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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레몬 Nov 05. 2024

라크리마 (Lacrima)

눈물을 향한 시선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  <이어령>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다.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구슬치기, 오징어 놀이를 하며 한껏 몸을 던져 놀다가도 어느 순간, 혼자 모래놀이에 빠져들곤 했다. 전속력으로 내달리며 바람을 맞고 뜀박질을 하던 발바닥을 이따금씩 모래 알갱이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도 혼자 남는 것이 괜찮았다. 그리고, 훌쩍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 손으로 모래를 쓸어내리며, 마치 그곳에 앉아 있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라도 되는 양, 끝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고난주간이 되면 친구와 함께 불 꺼진 성당 한가운데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곳의 고요와 어둠이 열두 살이었던 나를 압도했고, 높은 천장에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더 깊은 곳으로 잠기게 했다.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흐르는 햇빛이 하얀 벽을 따라 내려올 때,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이 온몸을 감쌌다. 성당은 내가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조율할 수 없는 눈물을 경험한 곳이다. 주변을 둘러싼 고요와 공간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이 경건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눈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인지, 마음속 고인 웅덩이에서 넘쳐흐르는 것인지, 닿을 수 없는 틈새에서 은밀히 스며 나오는 것인지 모른 채 살았다. 눈물은 마음 깊이 숨어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고, 잔잔히 고여 있다가 서서히 흐르기도 했다. 




2011년의 긴 여름 장마는 눈물과 닮아 있었다. 하늘은 좀처럼 개이지 않았고, 매일같이 쏟아지던 장대비를 피해 가며 친척과 지인, 선후배의 가족 등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여덟 번이나 장례식장을 오가며 무겁게 내리던 빗줄기처럼 내 마음 또한 가볍지 않았다. 겹겹이 쌓인 슬픔은 내가 모르는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고인들의 얼굴은 고요했다. 웃음이 남아 있거나 무표정한 낯빛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표정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눈물은 생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고, 이미 떠난 자들의 고요함은 저 너머의 무게를 품고 있는 듯했다. 고인의 얼굴에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놓인 경계의 무게를 실감하며, 나도 한동안 침잠해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에서의 죽음, 동료이자 후배 교사의 죽음, 거리와 일터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죽음은 생과 사의 경계가 얼마나 덧없고 가까운지를 받아들여만 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마지막도 멀지 않았음을, 연로해지시는 친정 부모님의 기운이 예전 같지 않음도 더욱 가깝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눈물의 바닷속에서 떠다닌다. 열렬히 삶을 붙들며 살아가지만, 그 길 끝에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자리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 어릴 적 성당에서, 아무 이유 없이 흘리던 눈물이 삶의 이면에 항상 숨겨져 있던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은 채 오늘을 산다. 그러나 그 끝자락에 죽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멀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죽음을 앞둔 이어령 선생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메시지는 귓등으로 흘려도, 언젠가는 홀로 마주해야 할 고독의 시간에 찾아온다.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도 눈물의 끝을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막힌 곳을 헤집고 흐르거나 깊숙이 묻힌 곳에서 배어 나오는 이 끈적한 생의 물기는 살아 있음과 동시에 삶을 온전히 붙들고 있음을 알려준다. 흘러가고, 스며들고, 고여 있다가 다시 가라앉는 건기와 우기가 반복될 때마다 떠나간 이들의 온기와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나의 체온을 함께 느낀다.


죽음과 생의 가장자리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어린 열두 살 아이의  느낌이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품고 살아가야 할 진실임을 확신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깊어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찾는다. 눈물이 우리에게 보내는 질문이라면 당신은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눈물



눈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홀로 견디는 우기엔  

뚫린 곳으로 한꺼번에 몰려온다 


밤하늘처럼 깊고 까마득한 샘 같아서 

솟는다

솟아 흐른다 


바다처럼 넓고 아득한 못 같아서  

밀려온다 

밀려 넘친다 


눈물은  

웅크린 구석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아포리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Remembering death is learning to live today.


프리드리히 니체( )의 아포리즘

삶이 나에게 고통을 가르쳤다면, 죽음은 삶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가르친다

If life has taught me pain, death teaches me 

how to cherish life.


나의 아포리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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