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과 심리적안전한 공간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왜 경청해야 하고, 왜 심리적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가?

by 정진


#경청 - 공감 - 갈등 - 공동체 - 평화


<우리는 왜 경청해야 하고, 왜 심리적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가?>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로부터 출발하고 싶다.


‘나’는 왜 ‘너’(타자)와 함께해야 하는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마음이 편하고자? 인류애를 위하여? 다 좋은 답이지만, 우리에게 근본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아니, 깊은 해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공동체를 추구하는가? 편함과 즐거움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혼자 방 안에 있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우리는 늘 공동체를 찾고, 그곳에 들어가 갈등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충만해하지만, 또한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 고통이 이 질문을 가져온다.


우리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그런데 ‘어떻게’ 전에, 왜! 굳이 우리는 이 고통을 선택하고, 아니 이 고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를 묻고 싶다.


여러분은 왜 공동체, 환대, 함께함, 공감, 경청을 담은 안전한 공간을 꿈꾸며 공동체(가족, 교회등등)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꼭 한번 답해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여러분은 아마도 수없이 많은 답을 내놓을 것이다.


나는 그 답들이 너무나 궁금하다.


나는 평생 이 질문을 던져오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질문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위니컷(Winnicott)에 의하면...


아이는 생후 0개월부터 약 6개월간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엄마는 곧 ‘나’고, ‘나’는 곧 엄마인 상태.


엄마의 반응 하나하나가 곧 자기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지는 시기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통해 안정을 느끼고,


엄마의 눈빛을 통해 ‘내가 괜찮은 존재’라는 확신을 쌓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이는 점차 충격을 받는다.


“엄마는 나와 다르구나…”


엄마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을 때


아이는 슬픔과 분노와 절망등을 처음 경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슬픔과 분노와 절망, 그리고 수많은 감정을 통해


“나는 엄마가 아니구나. 나는 나구나.”


하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란 자아가 생겨나는 출발점이다.


이 과정은 위니코트가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의 보살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엄마가 완벽하게 반응하지 않고, 때로 실망을 주는 것(위키코트는 이를 점진적으로 실망시키는 것이라고 표현)도


아이가 ‘나’라는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위니컷에 의하면 우리는 이 과정을 평생 한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나’를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칼융은 인생을 ‘진정한 자기(The Self)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삶은 진정한 ‘나‘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우리는 ‘나’를 찾기 위하여 ‘너’를 만난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혼자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나를 직접 볼 수 없다.


보는 자는 보는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를 통해 ‘나’를 본다.


여기서 우리의 고통이... 서로의 갈등이 시작된다.


‘너’는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에게 간절히 찾고 찾는 것은 결국 ’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가 엄마에게 저항하듯, 우리는 ‘너’(타자)를 보며 기대하고, 실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렇게 우리는 타자에게 환상이 깨지는 경험(적절한 실망)을 지나, 마침내 ‘나’를 찾고 ‘나’로 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일을 공동체에서 늘 경험해왔다. 공동체를 오랫동안 섬겨왔던 이들을 수없이 만나며,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이 과정을 늘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 리더로, 교사로, 섬김이로…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타자는 나를 무작정 기대하고, 사랑하며, 희망한다.


그리고 점점 실망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나를 미워하다가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공동체 리더들의 마음은 늘 다치고,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깊은 상처로 떠나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그 일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을 진정 돕는 방법이 이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랑받고... 미움받다가... 버려지는...(분리되는, 독립시키는...)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각오하고 이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에게 과하게 사랑받다가 적적히 실망시키고... 결국 그를 나에게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공동체 지도자도 그러하다.


공동체 지도자에게 우리는 (의식하든 못하든) 하나님 같은 안정과 안전을 기대하며 다가간다. 실제로 지도자는 그 기대를 등에 지고 사람들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을 ‘신’처럼 여기거나, 혹은 공동체가 지도자를 ‘신’처럼 만들어버리면, 적절히 실망할 기회를 잃고 관계는 왜곡된다. (환상을 깨고도 관계가 살아남는 경험이 필요하다.)


파커 파머는 그래서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동체는 늘 함께하기 싫은 사람이 있는 곳이다.“


공동체는 갈등을 피하는 곳이 아니라,


갈등을 건강하게 드러내고 함께 다루는 훈련의 장이다.


갈등이 일어나면 “우리는 실패했다”가 아니라,


“이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지점에 왔다”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온전히 담는 심리적 안전한 공간…


이것을 위해 우리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나’는 오직 ‘너’(타자)를 통해서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전한 공간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헌신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공간을 잘 세워가야 한다.


그런데… “심리적 안전”은 개념적으로 너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놀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싶다.


놀이가 무엇인가? 놀이는 규칙이 세워지고, 공유되고, 모두가 인식하고 지킬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는 책임이 따르고, 경우에 따라 잠시의 퇴장(거리두기) 같은 조치도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놀이가 놀이로 유지된다.


우리가 만들려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나쁘게 말하는 그저 계속 울고 징징대는 아이를 무한정 달래는, (실제로 종종 듣는 표현처럼) 그런 값싼 공감이 아니다.


물론 이 과정이 문서로 된 규칙만으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 자체가 우리의 안전한 벽이 된다.


설명을 위해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단/사이비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쉽게 나오지 못하는 것은 교리나 규칙 때문만이라기보다, 많은 경우 그곳에 나의 동료, 친구,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규칙으로만 움직이기보다 관계로 움직인다.


결과적으로 이 전체적인 심리적 안전의 벽(다겹줄)은 사람이다.


우리는 규칙을 세우고 공간을 만들고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하려는 일은 이렇다.


‘나’와 ‘우리’라는 벽을 세우고, 그 안에서 규칙 속에 갈등을 조정하며, 각자의 슬픔과 기쁨, 분노와 희열, 희망과 절망을 다루게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이후, 그 사람도 자기 안의 모습으로 가치와 의미를 따라 살아가며, 타자에게 안전한 벽이 되게 하는 것.


나는 늘 경청, 질문, 공감, 공동체 등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지향점은 결국 ’나’이며, ‘나’는 너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부딪힐 수 있는 안전한 공간(사람)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세워가자.


우리는 갈등의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들려 노력한다. 나는 믿는다. 평화는 평화를 경험해본 자를 통해 복제된다.


나의 삶은 바로 평화의 복제를 위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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