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일기(보통의 하루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남기는 기록)
[오늘의 단어] 일기(보통의 하루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남기는 기록)
하루를 마무리하고, 불을 끄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 오늘, 뭐 하고 살았더라?”
분명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던 것 같은데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고 간 대화 몇 줄,
메신저 알림 몇 개,
그리고 피로감뿐일 때가 많다.
우리는 할 일 목록은 참 꼼꼼히 적으면서
이미 해낸 일에는 조금 인색한 편이다.
아침에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적고,
낮에는 그 옆에 체크 표시를 붙이고,
저녁이 되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칸들만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온다.
‘이것도 못 했네.’
‘이건 내일로 또 밀렸네.’
그러다 보면 오늘을 거의 통째로
“부족했다”는 느낌으로 저장해 버리게 된다.
어릴 적에는 일기가 숙제였다.
“오늘은 ○○을 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비슷한 문장으로 줄을 채우고
선생님 도장을 받으면 그걸로 하루가 정리되었다.
그때의 일기는 조금은 형식 같았지만
그래도 “오늘 내가 뭘 했는지”를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일기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짧은 메모 앱,
잠들기 전 쓰는 한 줄 노트,
친한 사람에게 보낸 긴 카톡,
머릿속으로만 쓰고 지워 버리는 마음의 일기까지.
나 역시 요즘은 하루를 마치기 전에 짧게라도 한 줄을 남겨 보려고 한다.
“임시방편 같았던 내가 한 선택이 생각보다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나를 꼭 끌어안으면서 ‘엄마 오늘 많이 힘들었지?’라고 말했다.”
대단한 문장이 아니어도 이렇게 적어 두고 나면
‘아, 오늘 나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감각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
일기를 꼭 예쁜 문장으로 쓸 필요는 없다.
조금 솔직하게 적어도 괜찮다.
“솔직히 많이 지쳤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진 않았다.”
“별일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고마운 날이기도 했다.”
보통의 날을 보통으로 보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
일기를 쓰다 보면 비로소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보통의 하루는 그 자체로 꽤 많은 노력이 들어간 결과다.
큰 사고 없이 일정을 맞추고,
누구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말을 고르고,
내 기분이 좋지 않아도 아이에게는 최대한 웃는 얼굴을 보여 주려고 애쓴 시간들.
그런데 이렇게 하루를 버텨낸 사람에게
우리는 종종 “오늘은 별일 없었어”라고 말해 버린다.
일기는 그 말을 살짝 고쳐 준다.
“별일 없었던 게 아니라 별일 없도록 나름 최선을 다한 하루였다”고.
하루를 복기한다는 건
잘못한 걸 찾기 위한 심문이 아니라
놓칠 뻔한 것들을 다시 찾아오는 일에 가깝다.
오늘 누가 나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해 줬는지,
내가 누구에게 먼저 안부를 건넸는지,
언제 한 번이라도 ‘이 순간은 괜찮았다’고 느꼈는지.
그 장면들을 한두 개만 건져 올려도
오늘 하루 전체의 색이 조금은 부드럽게 바뀐다.
모든 날이 반성문으로 끝날 필요는 없다.
어떤 날의 일기는 그냥 이런 문장 한 줄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큰일 없이 여기까지 왔다. 수고했다.”
이 한 줄 속에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이불을 덮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움직였던 나의 시간이 있다.
오늘 혹은 어제의 일기를 단 한 줄만 쓴다면
어떤 문장을 적고 싶었는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제의 나는 생각보다 괜찮게 해냈다.”
“조금 서툴렀지만, 거기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별일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고마웠던 하루였다.”
그 어느 쪽이든 그 문장은 분명
오늘의 당신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의 단어를 이렇게 적어 두고 싶다.
일기.
바쁘게 흘러가 버린 하루를 조금만 천천히 붙잡아 보는 기록.
오늘 밤, 잠들기 전
마음속으로라도 한 줄을 적어 본다면
그 문장이 내일 아침의 당신을
어제의 당신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지 모른다.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는 잘 살았다.”
그 한 줄이 있다면
오늘이라는 하루는 충분히 괜찮았던 편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