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에게 쉬어가는 점(노래)

[오늘의 단어] 노래(오늘의 기분을 정리하는 3분짜리 쉼)

[오늘의 단어] 노래(오늘의 기분을 정리하는 3분짜리 쉼)


하루에도 수십 번, 어딘가에서는 노래가 흐른다.

지하철 안 이어폰, 회사 탕비실 스피커, 카페 BGM, 집 거실 TV.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중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아, 이 순간에 이 노래라니” 하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던 몇 곡뿐이다.


노래는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대신 그때의 기분을 통째로 가져온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듣는 노래는 ‘좋은 노래’이기 전에 ‘내가 그때 버티고 있던 하루’와 함께 묶여 있는 것 같다.


아침 출근길에 이어폰을 꽂는 순간이 그렇다.

지하철 안 사람들의 표정,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회색 건물들, 아직 덜 깬 몸과 이미 앞질러 가는 생각들.


그 사이를 연결해 주는 건 커피보다 먼저 재생되는 한 곡일 때가 많다.

“오늘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야겠다.”


가사 한 줄, 도입부의 몇 초만으로도 오늘 내가 어떤 속도로 걷고 싶은지, 어떤 마음으로 회사 문을 열고 싶은지 대강 정해지는 것 같다. 같은 출근길인데도 어떤 날은 조금 단단한 노래가 필요하고, 어떤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연주곡이 필요하다.


노래를 고르는 일은 오늘의 나를 대충이라도 살피는 일이다.


점심시간 카페에서 들리는 노래는 또 다르다. 주문을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다가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잠깐,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아, 이 노래. 예전에 자주 듣던 건데.”


그 순간에는 쌓인 업무도, 아침에 있었던 일도 잠시 멈춘다. 노래라는 작은 터널을 지나면서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고개를 살짝 뒤돌아보게 된다. 짧은 한 곡이 끝나면 다시 오늘의 시간으로 돌아오지만 마음의 온도는 조금 달라져 있다.


“그래, 예전의 나도 어떻게든 버텼으니까 지금의 나도 어떻게든 또 버티겠지.”


노래는 가끔 이렇게 근거 없는 낙관을 슬쩍 얹어 준다. 이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위로다.


일하는 중간에 듣는 노래는 조금 더 실용적인 의미가 있다. 메일과 보고서, 메신저 알림 사이에서 집중력이 바닥까지 내려갈 때 조용히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 곡 끝날 때까지만 이 부분을 해보자.”


3분, 길면 4분. 노래 한 곡의 길이는 집중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 같기도 하다.

플레이리스트는 할 일을 미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할 일을 끝까지 버티기 위한 연료일 때가 많다. 가사를 곱씹지 않아도 박자에 몸을 살짝 맡기고 있으면 생각의 매듭이 하나씩 풀리기도 한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아까보다 조금 더 나은 표정으로 다음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때가 있다.


퇴근길의 노래는 오늘과 내일 사이를 이어 붙이는 역할을 한다. 집으로 가는 버스나 지하철 안, 창밖이 검게 물들어 갈 때쯤 오늘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때 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평가와 반성보다는 정리와 인정을 도와주는 쪽에 가깝다.


“아, 이것도 나름 최선을 다한 하루였지.”

“저 말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도망치진 않았어.”


가사 한 줄에 마음이 걸리면 그 줄을 내 이야기처럼 잠깐 빌려온다. 노래는 내 편을 들어 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마음에 내려앉는다.


모든 사람이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겐 자기만의 ‘음악 일기’가 하나쯤 있는 것 같다.

어떤 곡을 들으면 특정 회사, 특정 사람, 특정 계절이 떠오르는 것.


“그때 그 프로젝트 끝내고 혼자 집에 가면서 들었던 노래.”

“아이와 처음으로 길게 손잡고 걸었을 때 이어폰 한 쪽씩 나눠 들었던 노래.”


음악은 날짜 대신 감정으로 시간을 기록한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굳이 다시 듣지 않게 되기도 하고, 어떤 노래는 힘들 때마다 다시 꺼내 듣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오늘, 혹은 최근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노래를 하나 떠올려 보면 좋겠다.

그 노래가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대신해 주고 있는지.


“조금만 더 버텨보자.”

“괜찮아, 다 지나간다.”

“너, 생각보다 잘하고 있어.”


어쩌면 그 곡은 당신이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해 주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단어를 이렇게 적어 두고 싶다.


노래.

하루의 어느 지점에서든 세상을 잠깐 작게 줄여 나와 내 마음만 남게 해 주는 3분짜리 쉼.

헬스장 대신, 약속 대신, 긴 설명 대신 재생 버튼 하나로 시작되는 작은 휴식.


오늘도 어딘가에서 당신의 하루와 은근히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이 배경처럼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노래를 듣는 몇 분만큼은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 잘 와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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