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 찍고 시작합시다.
점심(點心) - 점 하나 찍고 시작합니다.
“엄마, 점심은 마음에 점을 찍는 말이래.”
언젠가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침과 오후 사이, 딱 가운데에 찍어두는 점 같다고.
여기까지 잘 왔다고, 스스로에게 콕 찍어주는 표시 같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점심시간이 예전처럼만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사전에서 점심은 ‘낮 12시 전후에 먹는 끼니’라고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한자로는 點心, 점점이 찍을 點, 마음 心.
배를 채우는 일 이상으로, 마음과 몸에 작은 점 하나를 찍어주는 시간이라는 뜻이 오래전부터 이미 숨어 있었던 셈이다. 하루를 선으로 그리면 아침과 저녁 사이 한가운데에 찍히는 점, 그 점이 바로 점심이다.
일의 앞과 뒤를 나누는 경계, ‘오늘’이라는 긴 문장을 두 토막으로 나눠 숨을 쉬게 하는 쉼표 같은 자리.
회사에서의 점심은 대부분 바빴다.
메일을 정리하다가, 업무 등 각종 일정을 조율하다가, 부서 메신저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을 훑어보다 보면 점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지나가곤 했다. 식당에 가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오전 업무에 머물러 있고, 입안에 음식물을 넣고서도 다음 보고서가 마음 한켠을 계속 잡아당긴다. 그래도 “점심 같이 드실래요?”라는 말에는 단순히 밥을 같이 먹자는 의미만은 아닌 것 같다. “오늘, 너랑 여기까지는 같이 왔다”는 뜻이 조용히 섞여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은 식탁, 같은 반찬 앞에서 서로의 오전을 잠깐 확인해 주는 일.
잘 버텼다고, 이제 다시 오후를 가보자고 말 대신 건네는 작은 동의.
혼자 먹는 점심도 있다.
회의가 길어져 애매한 시간에 밥을 먹게 되는 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부러 휴대폰을 내려두고 숟가락을 조금 느리게 움직여 본다. 오늘 오전에 마음에 남은 한 장면을 골라본다. 누군가의 짧은 한숨,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며 나눈 인사, 이유 없이 마음이 뻣뻣해졌던 순간 하나. 억울했던 말 한 마디도, 괜히 뿌듯했던 순간도,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점 하나 찍어두듯 지나가게 한다. 판단이나 결론 대신, 그냥 표시만 해두고 잠시 놓아주는 일.
주말의 점심은 조금 다르다.
아이와 마주 앉아 김을 찢어 밥을 싸 먹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 든다. “오늘 점심은 마음에 무슨 점을 찍을까?” 아이에게 장난스럽게 물으면 “맛있는 점!” “쉬는 점!” 같은 답이 돌아온다. 그 대답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어른의 점심이 ‘해야 할 일’ 사이에 끼어 있다면, 아이의 점심은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 위에서 보낸다.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채우고, 해야 할 일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서 산다. 그 선 위에서 잠깐 내려와 점 하나가 되어 보는 시간이 점심일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할지까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여기 있다”고 나 자신에게 알려주는 작은 좌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30분은 그저 숨을 쉬고, 씹고,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시간.
그래서 요즘 나는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는 날에도 숟가락을 들기 전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늘도 일단, 여기까지는 잘 왔다고. 이 점 하나면, 오후를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나에게 쉬어가는 점 하나를 찍는 일, 그게 지금의 나에게 점심이 주는 가장 큰 역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