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광<잔광>

<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1부 잔광 | 〈잔광〉


어떤 끝을 지나고 나면,

세상은 갑자기 어두워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어둠은 바로 오지 않더라고요.


불을 끄면 잠깐 남는 빛처럼,

삶에도 그런 짧은 틈이 있었습니다.


그 틈에서 무너지는 대신,

숨을 한 번 더 쉬고

오늘을 ‘넘기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이 시집은

누군가의 자리를 그리워하기보다,

사라진 뒤에도 내 안에 남은 것들을 기록해보려 합니다.




<잔광>

불을 끄면

어둠이 곧장 오지 않는다.


방금까지 켜져 있던 하루가

벽지의 결에

유리컵의 물결에

잠깐, 붙어 있다.


사라진 것은 늘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빛도, 사람도,

내가 믿었던 세계도.


불을 끄면

어둠이 곧장 오지 않는다.

나는 그 사이를

숨의 너비로 건넌다.


침묵은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고

목젖까지 올라와

말의 모양만 남긴다.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

사람이 아니라

내가 기대던 모양이 비워진 자리.


그 위엔

끝내 하지 않은 말들이

자세를 고쳐 앉아 있다.


부엌으로 가

물을 받는다.

수돗물 소리가

내 안의 모서리를

한 번씩 깎는다.


백색소음.

켜고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이 떠지는 일,

열쇠가 주머니에서

작게 부딪히는 일,

손이 아직 따뜻한 일.


나는

괜찮아졌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살아 있다는 쪽을 믿는다.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나는 그 남은 빛으로

오늘을 넘긴다.


불을 끄면

어둠이 곧장 오지 않는다.


잔광은 작지만

나를 살릴 만큼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