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1부 잔광 | 〈접힘선〉
어떤 날은
종이를 만지게 돼요.
서랍 깊숙이 접어 둔 것들을
굳이 꺼내 펼쳐보는 날.
다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선은 남아 있더라고요.
빛을 받으면 더 먼저, 더 또렷하게요.
그래서 오늘은
‘누군가를 다시 부르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만든 접힌 자리에 대해 쓰려고 해요.
지워진 사연이 아니라, 남은 선이 내게 가르쳐준 방식들에 대해서요.
<접힘선>
접었다 펴도
종이는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밀어도
모서리를 눌러도
선은 제자리에
얌전히 남아 있다.
달력의 흰 칸에도
접힌 자국이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날인데
그날의 공기만은
한 번 접혀
서랍처럼 안쪽에 들어가 있다.
가끔은
그 흰 칸이 스스로 펼쳐진다.
설명 없이,
예고 없이.
그럴 때 나는
종이를 다시 접는다.
크게가 아니라
딱 내가 들 수 있는 만큼만.
불을 끄면
어둠이 곧장 오지 않듯
빛은 선 위에
잠깐 머물다 간다.
그 잠깐이
나를 살린다.
접힘선은
내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접어 둔 자리다.
다 펴지지 않아도 된다.
선이 있다는 건
한 번 살아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나는 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너무 세게 펼치지 않는 법을.
접힘선은
나를 망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다시 접어
지켜낸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