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1부 잔광 | 〈달력의 흰 칸〉
예전의 나는
흰 칸이 싫었어요.
비어 있으면
내가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까 봐,
내 하루가 얇아 보일까 봐
작은 글씨로라도 채워 넣곤 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끝을 지나고 나서
달력은 ‘계획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얇은 종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빈칸이 아니라,
내가 숨을 놓지 않기 위해 남겨둔 칸에 대해 쓰려고 해요.
<달력의 흰 칸>
달력의 흰 칸은
아무것도 없는 칸이 아니다.
펜이 가까이 왔다가
돌아간 자리,
지우개 가루가
조용히 쌓였다가
손등에 밀려난 자리.
흰 칸에는
적지 않은 하루가 있다.
말이 아니라
호흡으로만 남는 하루.
회의가 없는 날에도
해야 할 일은 생기지만
그날의 일은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창문을 여는 일,
물을 받는 일,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 일,
그리고
핸드폰을 잠깐 뒤집어 두는 일.
흰 칸은
나를 밖으로 끌어내지 않고
나를 안쪽에 묶어 둔다.
나는 가끔
‘괜찮다’를 쓰려다
그만둔다.
그 대신
‘아직’을 남긴다.
아직
손이 따뜻하고,
아직
숨이 돌아오고,
아직
내일을 고를 수 있다는 것.
흰 칸은
포기가 아니라
품위의 기술이다.
불을 끄면
어둠이 곧장 오지 않듯,
하루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오늘을 지나
내일의 칸 하나를
흰 채로 남겨 둔다.
빛이 들어올 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