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3부 여백 | 〈여백〉
무음모드로 밤을 지나오며 알았어요.
조용해지는 건, 마음이 아니라 세상이더라고요.
세상은 늘 “괜찮아?” 같은 말로 다가오는데
그 말이 선할수록 내 속은 더 바빠졌습니다.
설명하려다 스스로를 작게 접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저녁을 바꿨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정렬’하는 시간으로.
외로움이 나를 탓하게 만든다면
고독은 나를 읽게 하더라고요.
여백이란, 누군가가 없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다시 나를 놓을 자리라는 것.
오늘은 그 자리
내일이 들어올 만큼 남겨두는 한 칸에 대해 씁니다.
<여백>
불을 끄기 전
나는 한 칸을 남긴다.
식탁 위의 마지막 물기와
싱크대의 얇은 금속빛 사이,
오늘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틈.
나는 한 칸을 남긴다.
대답하지 않은 말들을
‘미안’으로 밀어 넣지 않고
‘설명’으로 포장하지도 않고
그대로 잠깐 눕혀두는 자리.
컵을 하나 꺼내
따뜻함을 손바닥에 올리면
하루가 내 몸에서
조금 물러난다.
그제야 생각이 제 크기로 앉는다.
고독은 텅 빈 것이 아니라
가득 찬 채로
나에게만 방향을 맞춘 상태.
나는 그 상태를
불행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유가 숨을 쉬는 각도라고 부른다.
현관에서 도어락의 불이 꺼지고
복도에서 따라온 공기가
문틈에서 끊어질 때,
집 안의 작은 것들이
비로소 들린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결,
충전 케이블이 닿는 미세한 금속,
싱크대 아래로 떨어지는 한 방울.
그 소리들은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나는 한 칸을 남긴다.
슬픔을 지우지 않되
슬픔이 나를 지우지 못하게.
기억을 덮지 않되
기억이 나를 덮지 못하게.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몸이 먼저 작아지던 습관을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여백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넘치려는 하루를
조용히 식히는 간격이다.
나는 그 간격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지 않는다.
불을 끄기 전
나는 한 칸을 남긴다.
그 칸에
오늘을 눕혀두고
내일이 올 때
나는 나를
거칠게 지나치지 않도록.
잔광이 남는 것처럼
여백도 남는다.
작지만
다시 굴러가게 할 만큼은
충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