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3부 여백 | 〈물의 단위〉
여백을 남기기 시작한 뒤로,
나는 큰 결심을 믿지 않게 됐어요.
대신 하루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가도
끝내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것-
그건 늘 아주 작은 형태로 와 있었습니다.
대개는 물의 얼굴로요.
말보다 먼저,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오늘은 그 단위를 적어둡니다.
컵 하나로 살아내는 밤에 대해.
<물의 단위>
컵 하나.
유리의 얇은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하루가 잠깐
말을 잃는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면
금속이 먼저 깨어난다.
끓는 소리-
작은 종처럼
“아직”을 울린다.
물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설명을 접는다.
오늘이 왜 이랬는지
누구 때문인지
어디서부터였는지.
대신 따뜻함을 삼킨다.
목 안쪽에서
울컥한 문장들이 흐려진다.
너무 뜨거우면 내가 다급해지고
너무 차가우면 내가 단단해진다.
나는 미지근함을 고른다.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체온.
컵 하나.
그건 위로가 아니라 수습이다.
다 흘러내리기 전에
가만히 모아두는 것.
나는 오늘을
물을 마시듯 넘긴다.
넘기는 동안 조금 남긴다.
내일이 올 때
어둠이 곧장 오지 않도록-
내 안,
한 모금의 빛이 머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