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광, 사라진 후 내게 남은 것들>
3부 여백 | <재배열>
물 한 컵으로 밤을 넘기는 법을 익히고 나니
그 다음엔 정돈이 남았다.
버리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의 자리를 다시 묻는 일.
같은 것이라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손이 닿는 속도가 달라지고
그 속도가 하루의 얼굴을 바꾼다.
나는 삶을 처음부터 시작한 적은 없고
무너지지 않게 순서를 바꿔온 적만 있다.
오늘은 그 순서에 대해 쓴다.
<재배열>
서랍을 연다.
안쪽에서
영수증 몇 장이
날짜를 흔든다.
나는 계산하지 않는다.
내일의 손이
먼저 갈 곳만 남긴다.
컵을 옮기고
약을 옮기고
충전선을 옮긴다.
같은 것인데
가까우면 숨이 붙고
멀면 버틴다.
나는
나를 버티게 만드는 자리에
나를 두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어떤 말은 아래로 내리고
어떤 기억은
빛이 덜 드는 쪽으로 돌려둔다.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달력의 빈 칸을
먼저 남겨두고
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 적는다.
삶이 밀어넣는 목록보다
내가 나에게 남기는 여백을
앞줄에 둔다.
불을 켠다.
스탠드가 종이의 결을 세운다.
그 결을 따라
문장들을 다시 놓는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처음처럼.
다시 시작이 아니라
다시 배치.
04:30,
첫 진동이 오기 전
오늘의 나를
제자리에 눕혀둔다.
잔광은
떠난 빛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이
자리를 찾을 때
잠깐 생기는 밝음.
나는 그 밝음으로
하루를
한 칸씩
정돈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