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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Jan 09. 2020

"시를 잊은 그대에게" 건넵니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시가 당신의 우물이 되어줄 거예요

나는 원래 멍게를 못 먹었다. 뭔가 비리고 물컹한 그 느낌이 싫어서 횟집에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 때 혼자 오이만 쌈장에 찍어 먹곤 했다. 그런 나에게 멍게의 맛을 알려준 '진짜' 멍게가 있다.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예쁜 섬에서 해녀 할머니가 잡아준 자연산 멍게가 그것이다. 비록 가격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영롱한 때깔과 신선한 내음이 잊히지 않을 정도이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막연하게 싫어하다가 '진짜'를 만나고 그걸 좋아하게 되는 순간. 나에겐 멍게가 그랬고, 과메기가 그랬고, 홍차가 그랬다. 죄다 먹을 거네. 그리고, 어제, 에세이가 딱 그랬다.


어딘가 어쭙잖은 에세이들에 질려버려서 '에세이 절대 안 읽어요'라고 외치던 내게 누군가 '그건 진짜 좋은 에세이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말하며 황현산 문학평론가님(님을 안 붙일 수 없다!)의 책을 추천해준 덕분에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덮은 어제, 에세이를 즐기게 될 것 같다.



시가 낯선 나에게

  

"시를 잊은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누군가는 <우물에서 하늘 보기>가 에세이냐고 할 순 있겠지만 에세이의 광범위한 정의를 고려한다면, <우물에서 하늘 보기>도 에세이다. 내게 황현산 문학평론가님의 책을 추천해준 분은 <밤이 선생이다>도 추천을 해주었었는데, 두 권을 한꺼번에 샀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먼저 읽었다.


최근 산문보다 운문에 흥미가 생긴 나는 시집을 두 권이나 사고도 한 글자도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글자 그대로 읽지 않고 있었고 읽지 않았던 이유는 시를 '읽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황현산 문학평론가님의 시화집인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마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시는 산문보다 낯설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건 시의 언어가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같은 언어를 시가 낯설게 써서인지 모르겠다. 읽는 것 자체도 낯설고 의미도 낯설고 평상시 자주 쓰는 단어도 시 안에 있으면 그 단어도 낯설다. 그래서인지 뭔가 시를 읽을라 치면 다른 감성을 장착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Photo by timJ on Unsplash_당신에게 시를 읽는 안경을 씌워줄 거예요.

그런 내게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시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라고 알려주는 건 아니다. 그냥 그분의 글을 따라갈 뿐이다. 따라가다 보면 아주 살짝 문틈 사이로 시의 세계가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시를 읽는 건 나의 우물에서 시인의 우물 속 하늘을 보는 것이다


Photo by Valentin Lacoste on Unsplash_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건...

처음에 읽다 보면 '이야 이 정도 깜냥이 돼야 시를 읽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사실은 그 정도 깊이가 있는 분이기에 시를 '그렇게' 읽은 것이지, 그 정도 깊이가 있어야만 시를 '읽을 수'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님은 그저 자신의 우물을 통해 시를 봤는데, 그저 그 우물이 나에 비해 매우 넓고 깊다고 해야 할까.


시를 보고 있는 황현산 문학평론가님의 세계는 하늘보다 '넓고', 우물보다 '깊다'. 처음에는 시처럼 써 내려간 그 감상들에 빠져서 시를 읽는 데에 엄청난 능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그저 다른 우물에서 시를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책장을 덮고 나면 나는 그냥 나의 우물로 시를 보면 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있는 글은 '이 시는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앞의 문장에 괄호 열고 '내가 느끼는' 괄호 닫고 있는 글의 모음이다.


시는 시인의 우물에서 바라본 세계다. 그리고 내가 그 시를 읽는 건 나의 우물 속에서 '시인의 우물에서 바라본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시가 낯설지 않았을까. 어쨌든 내가 처음 마주하는 시인의 우물이니까.



그런데,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또 다른 우물이다.


Photo by Jonas Verstuyft on Unsplash_세상을 보는 다른 우물

그런데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으면 아까 말한 것처럼 시로 보는 시를 읽는 기분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다. 보석이다. 그분은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나의 머리를 찌르고, 표현으로 가슴을 후벼 판다.


가슴에 묻자니 가슴이 좁고 하늘에 묻자니 하늘이 공허하다.

이 세상에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게 있을까.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고 있으면 그분의 우물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다. 시의 우물이 아닌 또 다른 우물 속에 있다. 이 우물 속에 있으면 내 마음과 머릿속 잡생각들이 고요해지고 오로지 시와 나만 있는 느낌이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또 다른 우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동안 익숙하게 읽어왔던 시를 다시 다른 느낌으로 읽게 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 고등학교 때 읽었던 이육사의 <광야>이고, 유치환의 <깃발>이고, 황진이의 시조다. 그런데 이 책 속에서 보면 전혀 다른 시다. 그래서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으면 새로운 27개의 시를 얻는 거나 다름없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결코 시를 읽는 방법을 선생님처럼 알려주는 건 아니다. 그냥 그분의 우물을 엿보며 조금씩 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황현산 문학평론가님이 시에 대해 썼던 말 중 가장 뇌리에 박혔던 문구를 끝으로 이 글을 마쳐본다.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 27장 <무정한 깃발>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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