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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Jan 26. 2021

3천 4백원의 감사합니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친절을 곱씹으며

자취를 해보면 안다. 가족과 살면서 쉬이 먹어온 '집밥'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차라리 스파게티를 해먹는 것은 편하다. 오히려 사소하게 보이던 멸치볶음, 장조림, 콩나물 무침이나 시금치 무침 같은 반찬들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것들인지 깨닫고 나면 사실 이런 반찬들이야말로 진짜 '요리'요, 우리집 엥겔지수에서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마트 반찬 코너에서 파는 '3개 만원' 코너는 자취하는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 이번 일주일 좀 아껴 살아야겠다 싶으면 어김없이 주말에 들러 3가지 반찬을 한참 고민 후에 고추장을 베이스 한 반찬과 간장을 베이스로 한 반찬, 그리고 거의 참기름으로 한 반찬이 잘 어우러지게 하나씩 골라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러나 때론 그런 대형마트 반찬 코너의 3개 만원 반찬 말고 조금 더 맛있을 것 같은 반찬이 생각 날 때가 있다.그럴 땐 마트 뒤에 있는 반찬 가게로 향한다. 비록 3개 만원의 가성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당히 제철 반찬들을 볼 수 있고, 양도 조금씩 더 많아서 일주일 나기에 아주 딱이다. 


그 날도 그냥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그냥 조금 더 맛있을 것 같은 반찬이 생각난 날. 그리고 부드러운 죽이 땡겼던 날. 마트 뒤에 위치한 자주 가는 반찬 가게에 들러 닭죽과 방풍나물(이건 마트 반찬 코너에 잘 없다)을 사서 봉투값까지 착실하게 지불한 뒤 영수증을 받아왔다.


집 냉장고에 반찬을 정리한 후 자기 전 지출 내역을 정리하며 가계부를 쓰다가 영수증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 ₩ 3,400


'감사합니다'에는 '₩ 3,400'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3,400원. 내가 산 건 닭죽이었는데, 영수증에는 '감사합니다'였다. 


3천 4백원의 감사함.


그것은 포스기에 특별히 미리 지정되어 있지 않은 3천 4백원짜리 반찬 때문에 만들어 놓은 임시 메뉴였겠지. 방품나물은 '방풍나물'이고 20원짜리 봉투도 '봉투'인데 건강 닭죽은 '감사합니다.'였다. 누군가는 그냥 '기타' 혹은 '포장' 따위의 명사로 저장했을 그 메뉴. 그 메뉴를 그냥 5글자짜리 동사로 바꾸었을 뿐인데, 이렇게 기억에 남는 영수증이 되었다.



이건 3천 4백원의 '감사합니다'가 만든 흔적. 회원 코드를 불러 달라고 하길래 핸드폰 번호의 첫자리 부터 '010...'하고 불렀더니 "뒷자리만요"라고 던지던 직원의 짜증도 잊혀지게 만든 그런 영수증. 


마감 시간 언저리에 찾아온 손님때문에 짜증이 난 반찬 가게 직원의 고단함을 되짚어 보게 만든 3천 4백원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임시 메뉴를 만들었을 반찬 가게 주인의 간절함을 감히 함부로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마술.


그냥 '건강닭죽'이었으면 이렇게 글은 커녕 반찬 가게 직원의 고단함은 되짚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수증 맨 끝에 의레 있는 문장도 아니고 품목의 이름이 '감사합니다'는 지하철을 거닐다 갑자기 맡는 델리 만쥬 향기처럼 기억 속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나니 문득 그날 받은 전화가 생각났다. 겨우 몇 천원짜리 봉투를 샀을 뿐인데 품절이라며 겨우 몇 백원 더 비싸지만 그것보다 좀 더 큰 봉투를 보내줘도 되겠냐고 묻던 아주머니의 음성. 그냥 품절이라고 취소해도 되었을 텐데, 어쩌면 취소가 더 귀찮은 작업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한 번 거절한 전화를 다시 굳이 걸어 그렇게 보내도 되겠냐고 물어봐주는 성의에 살짝의 감동을 맛본다.


3천 4백원의 '감사합니다'가 아니였으면 그 전화도 기억 속에 적히지 않고 날라가 버렸을 텐데. 그 독특한 영수증 때문에 또 하나의 감사한 하루가 생겼다. 정말로 감사했던 순간들을 만나서라기보다는 그 영수증 덕분에 나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친절을 곱씹어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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