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내돈내산'후기
오래 잘 쓰고 다녔던 화장품 파우치의 양 가장자리가 찢어졌다. 화장실에서 물에 젖고, 손 때가 묻고, 자크 색이 점점 벗겨지고 뒤에 붙어 있던 브랜드 라벨이 헤져도 들고 다녔는데 무슨 게임기의 L키, R키처럼 양 가장자리가 찢어지니까 이거 보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떠내 보내려고 하니 누가 선물을 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쉽다. 게다가 이미 원래 샀던 텐바이텐이나 핫트랙스에서는 진작 사라진 상품이고 네이버를 아무리 뒤져도 없다. 진짜 내 돈 주고 내가 산, 그것도 수집의 목적이 아니라 매일 쓰려고 산 물건에 이렇게 애착을 붙이게 될 줄 알았나 싶다.
연애를 오래 하고 있는 커플에게 대단한 사랑이나 그들만의 정이라던가 어쨌든 뭔가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봤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는 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도 자기들이 그렇게 오래 만날 줄 몰랐다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지금 내가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이 파우치도 그렇다.
맥시멀 리스트 주제에 물건에 질리기도 잘 질리는 내가 9년 넘게 오래 쓰고 있는 물건은 겨우 다섯 손가락을 넘는다. 그중 하나가 그렇게 아껴 쓰지도 않았던 '빈티지 룰즈(Vintage Rulez)'의 '집시걸'파우치다. 딱히 잃어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애지중지 갖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냥 매일 버스에서 찍는 교통카드처럼 가방에 넣어 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벌써 9년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그냥 모든 일상의 물건이 그런 것처럼 필요해서 샀다. 그렇게 사고 보니 너무 잘 맞아서 한 번도 화장품 파우치를 바꾼 적이 없다. 웬만한 펜형으로 된 화장품(아이브로우 펜슬, 아이라이너 등)은 다 잘 들어가고 섀도우 팔레트(에뛰드하우스 쿠키 어쩌고 같은 거)가 조금 길어도 잘 들어가고, 이니스프리의 스테디 템 노세범 파우더(너무 얇거나 작은 파우치에 넣으면 파우치 모양이 이상해 지거나 자크를 무리해서 잠가야 한다)도 쏙쏙 잘 들어갔다.
그렇게 넣고 지퍼를 잠그고 모양을 조금 잡아주면 웬만한 가방에는 다 들어갔다. 물론, 내가 클러치나 미니백을 극혐 해서 그렇게 초미니백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대체 가방으로서 기능을 할 수 없는 가방은 어쩌다 탄생했을까) 여하튼, 내가 가진 가방 중에는 좀 작은 가방이어도 다 들어갔다.
계속 내가 들고다닐 수 있었던 데에는 디자인도 한 몫했다. 만약 질릴만한 디자인이었다면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바꿨을 것이다. 그렇지만 겉모습에 질린 적이 한 번도 없다. 흔하지도 않다. 비슷한 스타일도 없다. 누군가 저 캐릭터가 나를 닮았다며 누가 그려준 거냐고 할 정도다. 그만큼 유니크한 파우치다. 흑 저 혼이 나간 눈알을 보라. 퇴근 시간을 4시간 넘겼을 때의 내 눈과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양 옆이 이렇게 찢어졌다. 대체 어쩌다가 찢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좀 작은 가방에 세로로 접어서 넣곤 했는데 여느 때처럼 그렇게 쑤셔 넣다가 발견했다. 평소에 매일 쓰던 물건이 망가지면 기뻐하는 편인데 - 예! 새로 사놓은 거 써야지!- 이건 좀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찢어지고 나니 그제야 해진 파우치가 보였다. 일러스트를 가린 투명한 PVC는 하도 어디에서 젖었다 구석에서 말렸다를 반복해서 일러스트에 있는 글자처럼 울대로 울었다. 검은색 자크는 가장자리부터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고, 분명히 직사각형이었던 브랜드 라벨은 여기저기 헤져서 모서리가 둥그레졌다. 대체 손으로 뽑은 적이 없는데 라벨을 박아놓은 실밥들은 모서리마다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튀어나와 있고, 좌우 균형을 맞추듯 오른쪽, 왼쪽이 전부 찢어져 있었다.
왜 마음이 아팠을까. 여기저기 너무 해져서 그랬을까. 다시 못 구한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다시 이만큼 잘 맞는 파우치를 다시 못 찾을 거라는 것을 알았서였을까.
이렇게 저렇게 뜯어보고 나니, 그 파우치처럼 내 마음도 조금 해졌다. 몇 년을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저 파우치가 찢어진 만큼, 딱 그만큼 해졌다.
당연히 그냥 버릴 수 없어서 쓰던 파우치는 고이 서랍 속에 넣어두고 새로 쓸 파우치를 찾았다. 매일 퇴근길에 핸드폰으로 텐바이텐, 에이블리, 핫트랙스. 지그재그 등을 탈탈 뒤져서 오래 쓸 요량으로 후보 2개를 골라 샀지만 그전에 썼던 빈티지룰즈의 집시걸 파우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하나는 생각보다 너무 힘이 없어서 흐물거렸고, 하나는 생각보다 길이가 짧아서 잘 넣고 다녔던 섀도우 팔레트를 빼야 했다. 도저히 그 파우치만큼 맞는 걸 찾을 수 없겠다는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까짓 파우치에 감정이 왜 이렇게 왔다 갔나 하나 싶었다.
서랍에 넣어둔 파우치를 꺼내 괜히 다시 만지작거렸다. 다시 갖고 다닐까? 근데 여기서 더 갖고 다니면 찢어진 부분이 이미 있기 때문에 더 빨리 잘 찢어질 것이다. 우리가 추억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워 그냥 흘려보내는 매일이 담긴 그 파우치를 그렇게 막 망가뜨리고 싶진 않아 다시 서랍에 넣었다.
결국 아이디어스에서 판매하고 있는 작가님을 다시 찾아 제작을 부탁드렸다. 판매가 중단된 상품이다 보니 괜히 다음에 또 부탁하면 죄송해서 미리 2개를 구매했다. 작가님 최고! 20년은 써야지. 작가님한테 20년 더 쓸 거라고 했더니 부담스럽다고 했다. 누가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따흐흑. 어쨌든 어려운 부탁인데도 들어주신 작가님이 최고다! 빈티지 룰즈 최고다!
덕분에 모두가 다 아는 그런 큰 브랜드 말고는 모르던 내가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를 만들고 싶게 되었다. 거기에는 빈티지 룰즈가 1순위로 등록되었다. 내가 인플루언서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동안 정든 물건들은 대부분 추억이나 의미가 있었다. 재수를 준비할 때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며 여행지에서 사다 준 손톱깎이, 다 써도 버리지 않는 일기장,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면서 잔뜩 받아온 편지들, 지금까지 친구들이 준 편지들, 엄마가 고등학교 때 사주신 와인색 가죽 사첼 가방, 생일 선물로 받은 좋아하는 캐릭터의 인형들, 여행지에서 보내준 엽서...
이런 물건들은 평소에 그냥 쓰다가도 내게 그걸 준 그들의 호의와, 사랑과, 관심이 문득 생각나서 다정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내가 내 돈 주고 산 물건 중에, 심지어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다니던 물건에 이렇게 정이 들 줄은 몰랐다. 그것을 바꿀 때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든 자리는 몰아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는 게 사람한테만 하는 말은 아닌가 보다.
새 '집시걸' 파우치는 내일도 나와 함께 일상으로 출근할 것이다. 이제는 조금 소중히 다뤄야지.. 진짜 20년은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