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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쩨리 Jun 10. 2020

작.꾸해요#3. 제일 뛰기 싫던 날 비가 왔다.

비는 대체 무엇일까요

시작할 때만 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뛰리라 다짐했지만 야외에서 뛰다 보니 운동을 유지하는 데에 날씨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날은 솔직히 비 맞아가면서 뛸 자신도 없고 그렇게 뛰었다가 괜히 독하게 감기에 걸려 다음날 출근을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됐고, 지금까지 눈이 올만한 날씨가 아니어서 눈은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눈 오는 날 걸어본 결과 뛴다면 뼈도 못 추릴게 뻔했다.


그래서 내 다짐을 흔들리게 할 비가 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비보다 더 큰 복병이 있었다. 5월의 긴 연휴 전까지 비가 크게 온 적이 없어서 비 때문에 운동을 쉰 적은 없었지만 연휴에 여행과 힘든 약속 일정들이 생기면서 일주일간 운동을 쉬게 되었는데 그게 내가 예상한 비보다 더 큰 걸림돌이었다.



관성의 법칙은 정말 싸이언스다


여행을 갔던 날은 여행지에서 뛰기 힘들었고, 여행에서 돌아온 날은 너무 힘들었고, 다음날은 약속이 있었고 주말은 주말이라 싫었고, 월요일에는 약속이 있었고,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라 마지막으로 푹 쉬고 싶은 마음에 푹 쉬어 버렸다.


그렇게 쉴 때 '쉬는' 관성도 있었지만 그동안 나를 뛰게 만든 건 '뛰는' 관성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서 쉬는 게 그런 걸림돌이 될지 몰랐다. 그러나 '쉬는' 관성은 '뛰는' 관성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실은 내심 알고 있었다. 이렇게 쉬면 다시 뛰기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그래도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뛰는 관성은 사실 내가 잘 가꾸어 주어야 했지만, 쉬는 관성은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날 겨우 나갔지만, 어떤 노래 가사처럼 발에 누가 껌을 붙인 듯 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와 타협하기

그래도 나갔던 날 만큼은 한 번도 타협한 적이 없었는데 껌 붙은 발로 뛰던 그날은, 타협을 하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일주일 쉬고 이렇게 나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 그래, 원래 운동은 헬스장에 나오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그래, 나는 4주 동안 안 쉬고 잘 달렸고, 평균 km당 8분 걸리던 걸 6분 30초로 단축했으니 충분하다!


원래는 12바퀴를 돌았어야 했지만 나는 그날 10바퀴만 돌기로 타협했다. 딱 10바퀴만 돌자. 겨우 2바퀴 정도는, 겨우 2바퀴를 덜 뛴 겨우 하루는,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 10바퀴는 그렇게


9바퀴를 뛰고 반환점을 돌아 마지막 바퀴라고 생각하며 9바퀴보다 더 힘차게 달려 나갔다. 끝이 보이는 고난은 그 끝이 제일 힘들지만 또 그 끝이 제일 힘찬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바퀴를 절반쯤 달렸을 때 투두둑.


빗방울이 머리를 때렸다. 비가 오전에 왔었던 날이었나, 대충 비가 올지 모르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나갔던 그 순간에 비가 오지 않아서 그냥 달렸었는데 갑자기 비가 왔다. 투두둑하고 빗방울이 바람막이를 때렸다. 


다행히 모자 달린 바람막이라 모자를 썼다. 어쨌든 마지막 바퀴를 달려야 하니까 계속 달렸다. 공원에서 농구하던 학생들이 사라지고, 그냥 천천히 걷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분수대 근처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커플도 하나 둘 없어졌다. 그 공원에 오로지 나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해방을 느꼈다. 빗방울은 점점 거세졌지만 뛸 만했고, 공원에는 나와 내 숨소리, 내 심장소리만 존재했다. 속도가 빨라졌다. 발에 붙어있던 껌이 떨어졌다. 발이 가벼워졌다. 마지막 바퀴를 첫 바퀴처럼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12바퀴를 뛰기로 결심했다. 10바퀴를 힘차게 뛰고 11바퀴는 기분 좋게, 12바퀴는 감옥을 탈출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뛰었다. 한 달 내내 12바퀴를 뛰는 동안, 좀 덜 힘든 날은 있어도 시원했던 날은 없었다. 언제나 힘들었고 언제나 지쳤는데 이 날은 그냥 시원했다. 왜 쇼생크 탈출의 그 장면은 비가 왔어야만 했는가를 그때 알았다.




운동을 쉬지 않았다면 비가 온 게 그냥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날 기분 좋게 뛰러 나왔다면 비가 운동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고 12바퀴 뛰려고 했던 걸 10바퀴만 뛰고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냥 10바퀴만 뛰고 들어갔을 것이다.


분명히 그동안 비는 운동의 방해 요소였는데, 그날은 나를 뛰게 만들었다. 그동안 비는 항상 문학 속에 등장하던 것처럼 우울의 상징 같은 거였는데, 그날은 응원이었다. 


쉬었던 날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기쁘게 뛰지도 못했을 거고, 비가 아니었으면 그만두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제일 뛰기 싫던 날, 비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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