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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다돌아 Nov 13. 2021

인생의 연장전, 좌충우돌 유령들의 세계

나혁진 [유령생활기록부] 책 리뷰



1. 유령으로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시공간의 한계에 갇혀 사는 인간으로의 삶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고 그럴 능력도 없으며 상대방의 속 사정을 알 수가 없을 때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 누군가를 몰래 지켜보거나 내가 몰랐던 사정을 알아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합니다.


   보통 '유령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생활하게 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면 마냥 해방감을 느끼거나 묘한 쾌감에 휩싸입니다. 누군가를 혼내주거나 몰래 훔쳐보는 야릇한 상상도 하게 됩니다. 나혁진 작가의 신간 [유령생활기록부]는 만약 '실제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령이 된다면 어떤 사후가 펼쳐질까?'라는 흥미로운 상상에서 출발한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유령 허영풍의 사후 삶은 기대만큼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생활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보니 달라진 상황에 적응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도 다양한 불편함을 야기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는 인간의 특성상 유령이 되었을 때의 자유로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인간사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고전 SF의 전설 H.G. 웰스는 소설 <투명 인간>을 통해 투명 인간의 장점보다는 아무것도 입을 수도 기척을 완전히 죽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는 투명 인간의 존재적 고충에 대해 강렬하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나혁진 작가 역시 유령의 존재적 고충에 대해 세밀한 시선으로 유려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모두가 유령이 된다면 아마도 유령 세상이 더 번잡하고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설정은 소설을 극적으로 이끌어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만 유령이 되고, 이후라도 납득할 만한 상황이 되면 소멸하거나 사후세계로 가게 된다는 설정은 독자가 이야기와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됩니다.




2. <유령생활기록부>가 더욱 재미있는 지점들

   <유령생활기록부>는 장르소설로 봤을 때 상당히 탁월한 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설정이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합니다.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지 않았던 상황에 대해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익숙함과 낯섬을 동시에 느끼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아, 그렇구나. 유령이 되면 저런 문제가 생기겠구나. 나라도 저렇게 느꼈을 것 같아'라며 공감하고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생활밀착형 드라마 같던 소설이 미스터리 요소가 어우러집니다. 여기에 "유령이라는 존재"만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을 잘 설정하고 이를 풀어나가며 장르적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쉽게 풀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일지라도 유령이라면 손쉽게 파헤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 탐정이나 형사들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 요소를 포함하게 됩니다. 여기에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설정상의 한계까지 잘 활용해 더욱 흥미로운 미스터리 소설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의 내면 묘사가 참으로 탁월합니다. 유령이 되어서 겪는 여러 가지 감정 변화와 복잡한 심경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필력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읽다 보면 '진짜 저런 마음이 들겠어'라며 공감하고 내 상황에 이입하기도 하면서 독서 중 다양한 감정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캐릭터를 독자와 동기화시키는 작업이 매우 잘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무게감에 있어서도 균형점을 잘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령 이야기라 기본적으로 코지 미스터리 같은 풍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도 유령으로도 살아가기 녹록하지 않은 존재적 괴로움에 대해 묵직하게 잘 묘사하고 있어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울한 소설은 아닌 것이 초중반에 약간의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배치해 무게를 줄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하나의 완결성을 띠고 잘 마무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소설적인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추리소설적 요소가 그저 포함된 것이 아니라 결국 유령생활기록부 스토리의 대단원을 마무리해 주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여겨질 만큼 설정과 전개의 인과관계가 유기적입니다. 인간의 삶이건 유령의 삶이건 대체로 기대하는 만큼 잘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극적인 마무리기는 합니다만 그렇기에 재미있는 한 편의 연작 소설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3.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살아있는 인간으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 아니면 먹고 자고 일하는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유령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지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유령생활기록부>라는 독특한 소설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소에 생각할 일이 없는 문제입니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유령의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라 생각되었던 부분은 존재적 외로움입니다. 수많은 인간은 유령을 볼 수 없어 그들의 존재 여부를 고민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논외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유령 입장에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도 주장할 수 없고 인간들에게 가닿을 수도 없습니다. 특정 영매를 통해서라면 존재를 알릴 수 있지만 지나치게 특수한 상황에 한정됩니다. 인간의 인격을 그대로 유지한 유령이라면 이런 철저한 외면의 상황에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적으로 존재를 확인받고 정서적인 관계를 맺고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회적 인간이라는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의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또는 외로운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솔루스(homo solus)], 그리고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등의 다양한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허영풍의 고달픈 삶을 대하며 공감도 하고 동정도 하게 되면서 정서적으로 복합적인 심정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점은 단순히 삶을 마감하고 유령이 된다고 해서 문제가 그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령도 유령 나름의 애로사항이 많고, 제한도 너무 많아서 유령이 된다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령이 되어도 고통받는 인생이기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볍고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 꽤나 묵직한 고민과 함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고민하고 전망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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