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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다돌아 Jul 01. 2018

걸리버 여행기

인간의 본성을 다양하게 실험한 풍자문학의 텁텁한 맛




1. 어린 시절 만난 축약 본의 폐해인가...


   어린 시절 만났던 걸리버 여행기는 여행 중 우연히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의 재미있고 신기한 모험기였습니다. 딱 거기까지가 가장 재미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부담 없어 아이들이 즐기기 좋은 부분이라 판단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맞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더 들어가면 그저 웃으며 즐기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니까요. 

   걸리버 여행기를 책이나 영화로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만큼 대중적인 고전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원작 소설 완역본 전체를 읽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 와중에 아내가 걸리버 여행기의 완역본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 놀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솔직히 만만해서 읽었습니다. 비룡소 완역본을 끝까지 완독하고 난 뒤 드는 생각은 '전혀 몰랐던 내용이 이렇게 많다니 어찌 된 거지?'라는 놀라움과 그냥 소인국을 모험하는 걸리버의 이야기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거슨 심각한 동심파괴랄까... 저의 고결하고 퓨어한 소울이 약 0.2% 정도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고전소설 축약 본의 폐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어떤 작품은 축약본만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너무도 정치적이고 풍자적이며 비판적인 작품이라 알흠다운 동화적 이미지의 걸리버 여행기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 어린 시절의 봄날 아지랑이와 목련의 순수함은 무심히도 걸리버와 라퓨타로 떠나버렸습니다.








2. 뭘 그리 물고 씹고 뜯은 것인가?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면 도대체 저자가 뭘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고 있는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하면 소설은 소설로 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장르 특성상 이 양반의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나니 얼마나 신랄하고 성실하게 빗대고 고발했는지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1700년대 초반 영국의 정치적 상황과 저자의 입장, 소속 등을 살펴보면 좋습니다. 출판사 리뷰나 책 정보,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에도 상세히 나와있습니다. 저까지 적는 건 일렉트로닉 에너지 낭비라 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시대적, 정치적 풍자도 풍자지만 이 작품이 이렇게 오랫동안 고전의 풍모를 풍기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의 풍자 대상과 비판 내용이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져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저자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내면과 외적 태도에 대해 매우 신랄하고 비판하며 아스트랄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스트랄했던 장면은 말한테 최고의 지성과 고귀한 존재라고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설정이랄까. 크으.



   저자는 크게 4부로 나누어 인간성을 시험대에 올립니다.  주인공 걸리버는 가장 먼저 소인국에서 상대적으로 힘센 거인 체험을 합니다. 다음으로는 거인국으로 가서 초라하고 힘없는 난쟁이 체험을 하지요. 세 번째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주변국, 일본까지 여행하고 돌아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비슷한데 더 추하고 지저분한 야후와 고결한 말 휘늠을 만나고 돌아와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초반은 가볍고 부담 없이, 후반으로 갈수록 더 불편하고 깊은 고찰이 이어집니다. 



   이런 구도는 몇 가지 이점이 있는데 일단 독자가 심리적으로 초반 소설에 몰입하기 쉽도록 합니다. 내가 소인국에서 거인이 된다면 아무래도 불편한 점은 많을지라도 목숨의 위협은 덜 하겠지요. 반면 거인국에 간 소인으로 설정하면 순간순간이 목숨을 건 사건들의 연속이 됩니다. 또한 배경과 환경 자체에 큰 변화를 주어 특정 상황에 반응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기에 용이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좋습니다. 제법 극단적인 모험의 대상은 현실감을 분리해 직접 비판이라는 낙인을 피해 가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이 불편해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은 위험하니까요. 

   저자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 자체를 혐오하는 수준까지 갑니다. 그리하여 책의 말미에는 인간의 체취만 느껴도 역겹고 돌아간지 5년이 지나서도 가족과 접촉 자체도 못하게 하는 상똘아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컸던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대로 말대가리에게 주인이라고 부르는 4부는 심정적으로 공감하기 힘들었습니다.   








3.  풍자문학 신랄하고 착잡한 것. 그것...


   이 책은 예상대로 출간되자마자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 자체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합당한 비판이라 하더라도 저자 스스로도 정말 무결하게 중립의 위치에 서거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던 한계가 있고,  본인 역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본인 역시 특정 당파의 입장에서 서 글을 써오던 사람인데 두 당을 동시에 모두 까기 하고 있으니 거시 커니 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나 종교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에너지, 그리고 다수가 모여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고 강화할 때의 그 파괴력은 대단한 것인데 그들이 심각하게 따지는 문제들을 달걀의 세로로 까냐 가로로 까냐의 문제, 또는 높은 굽을 신냐 낮은 굽을 신냐의 문제 등 시답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싸우는 인간들을 만들어 버렸으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비록 그게 바른 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입장이나 한계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대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제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여성에 대한 인식 문제입니다. 4부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등 매우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에 앞선 초, 중반에서는 여성이 배움이 모자라 생각이 없고 사고도 많이 치고 가만두면 남편 버리고 도망치는 그런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과학기술의 연구와 생활의 개선 노력 등을 매우 불완전하고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옛 것, 고전적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월든 같은 생활을 하자는 것이죠. 이는 특히 3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지막 4부에 가서는 인간은 추한 존재로, 그 이상향의 모습으로 말을 고귀함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인간 본성의 선함보다는 구제불능의 악하고 게으른 모습을 지나치게 아스트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왜 말에 꽂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위풍당당한 말의 모습에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고귀한 존재라고 하니 쉽게 공감하기가 어려운 설정입니다. 저는 좀 불편했어요. 거 뭐 적당히 좀 하지 그랬냐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꼰대스러웠거든요. 

   이제 와 걸리버 여행기의 전모를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씁쓸하고 찝찝한 기분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시원하게 덩이 다 안 나온 느낌. 몰라도 되는 걸 굳이 알아서 뒷골이 살짝 뻐근한 느낌이 남습니다. 이를테면, 프로필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서 미인일 것이라고 한껏 상상하고 있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건 그냥 모델 사진을 올려둔 거였어!!!! 사실은... 쩜쩜쩜... 뭐 이런 느낌이랄까... 아.. 텁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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