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다돌아 May 08. 2023

토론 세계 챔피언이 알려주는 좋은 토론을 위한 모든 것

서보현의 [디베이터] 책 리뷰





1. 우리에게 참으로 생소하고 어색한 토론의 세계

대한민국은 정말 토론에 약한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전 국민이 시청하는 TV 토론에서도 무논리로 쳐 싸우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부터, '좋은 게 좋은 거', '정으로 사는 세상'까지 관계 중심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모 아니면 도'식의 흑백논리가 익숙합니다. 토론에 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열을 중시하는 고전적인 문화의 영향이 큽니다. 관계에 있어 예의를 중시하거나 나이를 중심으로 위계가 형성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깊이 뿌리내린 '까라면 까야 되는' 군대 문화도 한몫합니다.


얼마 전 달라진 토론, 논술 교육 수준이 궁금해서 대형 서점에서 교재와 참고서를 확인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이들 국어, 논술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기도 해서 궁금했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확인한 논술 교재의 수준은 참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토론, 논술이 뭔지도 모를 그 옛날 주입식 교육이 성행하던 시절의 교재보다 크게 나아질 것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정해진 내용을 일방적으로 외우듯이 주입하는 방식의 교재들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의 교재들이 가득한 이유는 교재를 고르고 선택하는 수요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겠고, 그런 교재를 선택하는 선생님들은 교육의 가시적인 실적을 기대하는 학부모에게 맞추느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교육도 돈을 지불하는 수요자의 기대와 요구에 최적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원론적인 교육으로 가기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겠습니다


사회를 돌아봐도 토론 문화랄 것이 없는 수준입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의 문제 등은 특히 토론 영역에서는 금기시하는 분야로 서로 말을 꺼내면 감정만 상하고 분란만 일어납니다. 오로지 자기 성향에 맞는 알고리즘을 따르는 유튜브의 세례에 자기 확신만 계속 강화되어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흑백 논리만이 존재하는 모노톤의 세상에 살아가는 느낌입니다.


논쟁을 바람직한 토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을 우선시하는 문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논쟁이 생기면 서로를 설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싸움 국면으로 흘러갑니다. 이런 흐름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가 깨지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논쟁을 회피하며 자기를 감추다 보면 속으로 분노가 쌓이고 울분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갈등을 줄이면서도 상대의 의견을 잘 경청하고 자신의 뜻을 잘 관철시킬 수 있다면 인간관계도 잘 맺을 수 있고 속에 맺힌 한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개운한 속으로 나의 태도가 안정되면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사회에서 인정도 받으며 여러 면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토론을 할 수 있고,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며 유의할 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은 이 분야의 최고를 찾아 그의 고견을 듣는 것입니다. 문학동네의 신간 <디베이터>는 세계 토론대회를 두 번이나 우승하고 젊음을 토론에 바친 전 세계 토론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서보현 작가의 토론 일대기가 담긴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좋은 논쟁과 토론의 기본 요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2.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 스토리텔링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에 압도되었고 책의 두께에 놀랐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두껍고 글씨가 작은 책은 되도록 피하는 편인데, 이 책은 이상하리만치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흔치 않은 주제인데다가 토론이라는 주제로 이렇게 긴 내용의 글이 나올 것이 뭐가 있나 의아했습니다.


당연히 교과서적으로 토론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토론의 정의와 방식, 유의점과 토론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비법 같은 것들이 "일본 자기 계발서"식으로 잘 정리된 책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초반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토론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부분을 읽을 때, 본격적으로 딱딱한 이론을 꺼내지 전에 자기소개 겸 아이스브레이킹 개념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일기나 일대기처럼 저자가 겪은 일을 중심으로 에피소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토론의 이론이나 핵심 요소, 다양한 예시가 녹아있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예상보다 책이 술술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그 와중에도 길어서 힘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치 특정 분야의 고수가 TV나 유튜브 인터뷰 방송에 나와서 자기 썰을 길게 풀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상당히 정제된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누군가의 경험담을 읽는 것은 재미없는 이론이 정리된 책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읽는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저자의 스토리텔링으로 책 내용이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책의 말미에서 지인들이 우려를 표하는 부분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정서에서 익숙하지도 관심을 받지도 못하는 토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풀어내기에 최적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스토리텔링 방식의 책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었을지 상당히 의문스럽습니다. 중간중간에 잘 정리된 토론에 대한 이론은 사실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계 토론대회 우승자인데 한국인이라는 저자의 이력 때문에 읽게 된 책입니다. 서구권의 토론 문화가 우수하다는 선입관이 있기도 했지만 항상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저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었습니다. 사람의 퍼스널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관심사와 이론적 배경이 얹혀있는 방식이 아주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디베이터가 지향하는 바와 우리의 현실

이 책 <디베이터>에는 흥미로운 개인의 인생 여정 위에 토론이라는 테마가 흐르고 있습니다. 1부에서 토론의 다섯 가지 기술인 논제, 논증, 반론, 수사법, 침묵에 대해 설명하는 데 절반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토론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논제는 매우 신중하게 정해져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토론은 결국 청중을 설득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일이므로 어떻게 설득하기 위해 논증을 세우고 전달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토론은 상대가 있는 말하기이므로 상대의 논증을 어떻게 "잘" 반대해서 반론을 이끌어내는지도 토론을 이기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후반부에 인공지능과의 토론 부분에서도 크게 부각되지만 결국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므로 어떻게 임팩트와 감동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수사학적 고민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침묵은 가장 의아했던 요소기는 합니다만, 잘 생각해 보면 침묵으로 반대를 표현하는 기술도 극적이고 매우 유용한 방식입니다.


2부에서는 토론의 기술을 활용해서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무례한 사람을 여유 있게 상대하기 위한 자기방어 기법은 물론 이기던 지던 품위 있게 해내는 법을 배우는 일에 대한 설명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요소는 토론의 근본적인 목적과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나 별다른 관계가 없던 사람과는 비교적 냉정하게 토론을 진행하기가 용이합니다만, 사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토론은 감정싸움으로 흘러가기 십상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가까운 사람과 잘 토론하는 법은 무척 중요한데 이 부분도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마지막 장에 소개된 인공지능과 토론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체스나 바둑과는 달리 토론은 사실이나 수치를 많이 들이 된다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 무언가가 청중의 마음에 와닿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적으로 인공지능이 한없이 유리한 분야일 것 같지만 의외로 인공지능이 해내기 가장 어려운 분야 중 하나가 토론입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과 똑같은 외피를 입고 표정이나 제스처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결과가 또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이 정복하기 어려운 분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런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토론 대결 국면을 설명하면서 토론의 깊이 있는 특성과 본질에 대해서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과 인공지능의 차이 등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돕습니다.


결국 이 책은 토론이 무엇인지 교육할 목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좋은 논쟁과 토론 문화가 어떻게 확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던져주기 위한 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저자에 대한 리스펙트가 생기기도 하고,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토론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삶의 태도와 지향점을 고려해도 정말 좋은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인관계를 잘 할 수 있는 말하기의 기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