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서사] 책 리뷰
1. 악인의 서사에 대한 복잡한 쟁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문장은 언듯 정언적 명제처럼 보입니다. 이 문장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어, 그렇지 악인에게 서사를 주면 악을 옹호하는 모양새가 되서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겠지. 옳지 않아.'라는 도덕적 사고로 이어집니다. 이 정도면 교육을 잘 받은 사람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쯤 문장을 곱씹다 보면 의문이 스믈스믈 생기기 시작합니다.
'왜? 왜 꼭 그래야하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악인에게 서사를 준다고 그걸 그대로 믿거나 옹호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가?' 내지는 '악인에게 아예 서사를 안주면 도대체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가 가능한 것인가?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억압적 표현 아닐까?'라는 반발이 생기기도 합니다.
단순하지만 단호하기도 한 이런 문장은 늘 논쟁을 불러 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트위터 상에서 큰 논란으로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독서 모임의 젊은 멤버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 논쟁이 트위터를 통해 상당히 뜨겁게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 번에 140자밖에 쓸 수 없다는 트위터 플랫폼의 특성이자 한계는 이 심오한 논쟁을 점점 상호 비방과 감정적 대응으로 이끌고 가버렸고, 결국 배가 산으로 가다 못해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결과를 내면서 소모적 논쟁으로 흐지부지 된 모양입니다.
애초에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문제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정말 수많은 논쟁의 여지를 만들수 밖에 없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악과 악인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고, 어디까지가 서사를 주는 것인지, 그것 자체가 옳은 것인지,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대고 제한과 재단을 해도 되는 것인지, 창작물을 소비하는 소비자는 스스로 이를 구분하고 바르게 소비할 역량이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지, 누구에게 이렇게 제한할 권한이 있는지, 실제로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일이 현실 세계에 부작용을 야기했는지, 이를 증명할 방법은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지, 창작물을 심의하는 역할은 누가 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누가 판단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논의점과 판단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단순히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도 좋으냐, 절대 안되냐의 단순한 질문과 답변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트위터로 논쟁하다가는 애초에 논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 쉽게 예상됩니다. 이런 논의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살펴본 다음 차분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필요에 의해 탄생한 책이 바로 <악인의 서사>입니다.
2. 다양해도 너무 다양한 관점들
부끄럽게도 애초에 이 책을 접할 때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창작물 속에서 나타난 악인의 유형을 설명한다거나 어떻게 매력적인 악인을 탄생시켜 독자들의 호응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 가볍게 논의하는 캐주얼한 책이 아닐까 상상했던 것입니다. 기존에 비슷한 형태의 책들을 좀 접했기 때문에 이런 선입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악인의 서사"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다양한 관점을 다루는 책이었습니다. 9명이나 되는 저자가 다양한 장르의 창작물 속에 드러나는 악과 악인의 서사의 문제를 약 14,000분량으로 쓰고 있습니다. 140자의 한계를 100배 벗어나 좀 더 심도 있는 논의의 장으로 단행본을 활용한 형국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글을 정말 잘 쓰는 분들입니다. 글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논리적입니다. 다들 한가닥하는 분들이라 책 한권에 모아놓긴 했지만 각자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데 여념이 없는 느낌으로 출중한 글들이 이어집니다. 한편 한편이 다 흥미롭고 배울점도 많은데다가 새롭고 신선합니다. 그리하여 애초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기본 명제를 기반으로 독자에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저 역시 이 아홉 꼭지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사이트를 많이 얻었습니다.
이 책은 서두에 편집자가 등장해 "편집자의 말"로 시작합니다. 통상 편집자는 책의 말미에 책을 만든 동기나 내용정리, 감상 등을 쓰고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서문이나 머리말처럼 편집자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이 책을 만들 때 편집자의 역할이 컷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도 같고, 편집자도 이 책의 구성상 내용의 통일성 관점에서 지나치게 다채롭다는 것을 의식한 것도 같습니다.
편집자가 등판해서 책이 만들어진 취지를 설명하고 주위 환기를 한 후 각 저자의 글을 간단히 요약해서 논지를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친다는 것은 앞으로 등장할 저자들의 글이 독자들이 편히 이해하기에 녹녹치 않다는 전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저같은 평범한 독자가 읽기에 상당히 어려운 글들입니다. 아마도 평론가들이 많이 포진되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한편, 하나의 책으로 엮기에 논지가 지나치게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애초에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만한 주제라 그런지 심하게 말하면 내용이 중구난방이라고까지 느껴졌습니다. 글 한편 한편이 쉽지 않은데 각자의 논지도 다 다르고 입장도 다양하다보니 독자가 입장정리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책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이 주제는 그게 또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3. 창작의 영역과 소비자의 영역
애초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명제 자체가 매우 도덕적인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창작의 영역에서 보면 창작자에게 독자들이 특정 선택지를 강제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 때 이 명제가 매우 도덕적이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당연한 요구로 보여지기 때문에 끝없이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악인에게 그럴 듯한 서사를 부여하면 악인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이 과정에서 정작 주목받아야 할 피해자가 소외되는 기현상이 야기된다는 것이 이 주장의 주요 요지입니다. 정말 창작물에서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그런 현상이 이 결과로 벌어지는 것인지 인과관계가 증명이 된 것인가 이미 의문입니다. 창작물의 창작 방향과 별개로 현실 세계에서 악인에 의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소외되는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 인것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창작물에서의 악인의 서사와의 인과관계 여부를 검증하는 문제에 앞서 우리가 미리 조절할 수 있는 창작물에서만이라도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볼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가 악인에게 멋진 서사, 그럴듯한 과거사를 부여한 스토리를 소비한다고 해서 악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애초에 관심을 가져야할 피해자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가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애초에 끔찍한 범죄 앞에서 피해자를 애도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범죄자의 의도나 범죄 과정에 더 흥미를 보이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이 반대로 창작자들에게 흥미롭게 소비될 창작물을 제작하는 동기로 작용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들어 놓으면 소비하니 만들지 말라는 주장과 유사해지는데, 현실속 창작의 영역은 독자들의 관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주장이 이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제대로 된 해결책인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창작의 영역에 제약을 가하고 미리 간섭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역시 고민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작자는 그 어떤 도덕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창작하고, 다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소비자 역시 자유롭게 즐기되 도덕적인 문제건, 창작의 질이나 형식, 구조의 문제건 아니면 주제 의식의 문제건 자유롭게 비판하고 함께 토론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인의 서사>는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문제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해하고 정리하기 쉽지 않을 만큼 다양한 시각이 담긴 책입니다. 시도는 훌륭했고, 독자에게 고민하게 하고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렵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느낌으로 정리가 하나도 안되서 읽고나면 더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악인의 서사와 피해자 문제"에 대해 평소 관심이 있으시거나 창작 서사에서 악을 재현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흥미롭게 읽으실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