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장편소설 <크로노토피아> 책 리뷰
1. 잘 구성된 대중성 넘치는 장르소설
<크로노토피아>는 조영주 작가의 신간 장편소설입니다. 작가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던 작가의 진폭이 최소화된 완성형 소설입니다. <크로노토피아>는 읽는 맛이 좋은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독자 입장에서 최고의 장르 소설은 그냥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심오한 주제 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소설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정말 빠른 속도로 재미있게 읽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독자가 심각하게 보면 심각하게, 가볍게 보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기에 충분한 대중성 있는 소설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문장입니다. 유난히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긴 글을 읽는데 힘들어하는 독자들의 니드에 매우 부합하는 형태의 글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짧고 간결한 호흡으로 읽기 좋습니다. 단행본 시장에서 살아남는 소설이란 건 작가 자체가 브랜드가 된 몇몇 대형 작가의 작품이거나, 가독성 만큼은 웹 소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전개가 빠르고 경쾌해야 한다고 봤을 때 이번 작품은 이런 흥행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등의 짧은 이미지와 영상에 길들여져 긴 글 읽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저도 점점 책을 읽는 행위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끊어 읽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고 있는데도 이 소설은 한 호흡으로 후루룩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흥미를 잃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적인 재미가 충분히 넘치는 소설입니다.
SF 소설을 좋아하거나 SF 영화, 드라마에 익숙한 분들에게 타임 루프는 식상한 설정입니다. 타임 루프 형식을 가져와 재미있는 소설을 써내려면 적어도 기존에 선보인 타임 루프 물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크로노토피아>속 타임 루프의 활용을 생각하면 작가가 이런 타임 루프 물의 기본 룰은 지키는 가운데 진부한 전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타임 루프와 멀티버스 개념은 지나치면 독자가 이해하기에 난해해질 수 있는데 적정성을 잘 지켰습니다.
최근 애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을 나서면 다른 공간이 펼쳐지는 형식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어왔습니다. 문이라는 이미지에 규칙을 부여해 활용한 부분도 상당히 돋보입니다. 이 설정은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 용이하고 독자 입장에서도 익숙해서 좋습니다. 이런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설정의 활용은 독자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2. 독자에게 질문하는 깊이 있는 소설
요즘에는 웹 소설도 고도화되어 작품성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양적으로 성장하다 보니 완성도는 떨어져도 빠르고 흥미로운 전개로 돌파하는 방식과 충분한 작품성을 압축적으로 구성한 소설들이 양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문학계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장르소설, 특히 웹 소설이 순문학을 업고 가는 형국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행본,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설자리가 더욱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일부 스타 작가 외에는 소설의 질 여부를 떠나 독자에게 가닿기가 기본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입니다. 표면적으로도 가볍지만 가독성 좋고 트렌디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이 또렷하고 독자들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흥미와 깊이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소설을 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로노토피아>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삶이 무엇인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맞는 것인지, 이야기를 만들고 글로 남기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 방식이 상당히 세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포인트가 되는 주제 질문이 스토리 진행과 캐릭터의 경험, 사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독자는 이런 형식을 통해 가르침이나 꼰대질로 느껴지지 않고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시하고 넘어가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낼 때 더욱 만족감이 넘치고 정신이 고양되는 법입니다. 좋은 소설을 읽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데, 이 절차에 작가가 인위적으로 간섭하려 시도할 때 독자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우 독자는 책을 읽다가 집어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크로노토피아>는 나이 어린 주인공 소원을 등장시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소설 속 다양한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도 약간의 모범 예시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절제함으로써 독자들의 영역을 확보해 주고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소원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 임례와 함께 자신의 남다른 상황과 삶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지프스 신화, 파우스트, 이방인 등의 고전 소설을 레퍼런스 삼아 자신만의 이야기, 자기 소설을 쓰고 고쳐나갑니다. 이미 삶의 의미를 고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소설로 남겨둔 불멸의 고전들도 소원처럼 자신만의 경험의 변주를 담은 이야기를 남기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 스토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공감을 얻고 감동을 주느냐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누구나 스토리를 창조하고 의미 부여를 해 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작가가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차용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고전적 삶의 의미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각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인간의 경계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누구나 항상 고민하고 각자 찾아나가야 할 인생의 큰 화두이자 테마입니다. <크로노토피아>는 부드럽고 먹기 좋은 껍질 속에 잘 응축된 속살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쉽게 재미있게 잘 읽히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소설을 만나보시려면 이 소설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