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 <채널을 돌리다가> 책 리뷰
1. 작가가 장르 곽재식 작가의 책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은 제목이 이상합니다. <채널을 돌리다가>라니요? 이게 뭔 책일지 제목 만으로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데다가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표지마저 뭔가 좀 어설프고 난잡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나마 부재를 보니 SF 장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다 책의 저자가 너의 사랑 나의 사랑 곽재식 작가라니!! 갑자기 '아닛. 이건 꼭 읽어야 해!!'로 생각이 급변합니다. 저는 곽재식 작가를 너무 좋아합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과하게 집착하거나 깊이 빠져들지는 않아서 그저 뭐 하시는 분인지 알고, 책을 몇 권 읽어본 것이 다입니다. 꼭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분의 성격이나 외모, 행보에서 느껴지는 그 엉뚱 발랄한 매력과 밝고 경쾌한 유머와 위트를 너무 좋아합니다.
결국 작가에 대한 호감 때문에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곽재식 작가라면 SF 장르에 관해 무조건 재미있는 이야기를 뽑아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쳐 들었고 결과적으로 저의 기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SF 장르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오랜 구력이 책 전반에 광활하게 펼쳐질 뿐 아니라 소개되는 한 편 한 편이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한 맛이 있었습니다.
반면 저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작품들이 너무 과하게 진짜 굉장히 억수로 베리베리 리얼리 오래된 고전 작품들이어서 '책을 주로 소비하는 젊은 분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굳이 한정 지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40대 이상의 독자들이 읽어야 더 공감하며 추억에 빠져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 SF 장르, 특히 SF 영화에 최적화된 훌륭한 가이드북
이 책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지점은 SF 장르 고유의 특징은 물론 역사적 발전사와 대표 작품을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시선을 간접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한국인들이 SF 영화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SF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 SF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소개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SF 영화에 드러나는 사회적 메시지를 어떤 식으로 소비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균형 잡히고 차분한 비평이 훌륭합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편협함 등은 대체로 타협하기 힘들어 작가들이 다루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만,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일반론으로 끌고 나가는 점이 좋았습니다.
SF 장르의 기본 토대가 과학, 그중에서도 현시점에서 아직 실용화되지 않는 과학적 성취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때, SF 영화 속에 차용된 과학적, 기술적 배경과 묘사가 어떠한지, 관객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유용합니다. 작가 특유의 가볍지만 정곡을 찌르는 방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SF 장르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어 좋았습니다.
3. SF라는 틀 안에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이 책은 어쩌면 곽재식 작가만 쓸 수 있는 책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의 관심사가 SF에 국한되지 않고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는 물론 괴물, 귀신, 역사, 화학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이런 왕성한 호기심과 끊임없는 탐구는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 스며든 SF적 요소에 대해서 분석할 때 더욱 빛납니다.
자신이 사랑한 영화의 우수함, 위대함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입에 침을 바르고 들떠서 이야기하는 작가는 마치 아이 같아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이렇게 엉뚱하기만 했다면 사실 매력이 덜할 텐데 특정 파트에서는 정말 진지하고 지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탐구해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유쾌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기분입니다.
곽재식 작가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영화와 관련된 글을 써왔고, 특히 SF 영화와 TV 시리즈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글을 기고해 왔기 때문에 글 하나하나에 상당한 구력이 느껴집니다. SF가 단순 공상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인 고증을 거쳐 현실에 실현 가능한 문제를 다룬 경우도 많은데,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챕터인 "좀비 생물학"은 저자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챕터입니다. 아이티에서 부두교로 인해 좀비의 존재가 시작된 이유를 고구려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다툼의 역사를 끌어야 설명하는 것부터 인상적입니다. 초기 부두교 좀비의 특징은 물론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현대의 대중적 좀비가 탄생하게 계기까지의 설명도 물 흐르듯 부드럽습니다.
좀비의 부활을 이끈 게임 속에 좀비의 등장 이유를 심리학적 관점으로 분석한 부분도 눈에 띕니다. 다수의 영화가 사회 비판의 일환으로 좀비를 활용한 점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부두교에서 영화 부산행에 이르기까지 좀비의 역사와 변천사를 조망한 내용 역시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자는 현실 속에 좀비의 출현이 가능할지까지 분석하고 있습니다. 좀비가 출현한다면 과학자들이 오히려 좀비를 실험체 삼아 좀비 바이러스에서 죽지 않는 영원한 에너지를 추출해 인간들에게 적용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발상이 곽재식 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즐겁게 보아 왔던 추억의 레트로 감성이 짙은 책입니다. 꽤나 진지하고, 책 속에 다루고 있는 영화가 오래된 작품들이라 다소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만, 영화 비평과 과학적 이론, SF와 사회와의 관계, 인간의 본질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훌륭한 책입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