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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다돌아 Jan 02. 2019

가쿠다 미쓰요의 20대 시절 사랑과 삶의 흔적을 읽다

에세이 :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해 - 시와서

1. 애정 하는 일본의 여류작가 가쿠다 미쓰요, 그 반가움과 난처함 사이


   가쿠다 미쓰요는 제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일본 여류 작가입니다. "시와서 출판사"에서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집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너무 반가워서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 읽다 보니 그저 반갑고 즐겁게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가쿠다 미쓰요 누님이 현재의 이야기를 써낸 에세이가 아니라 아직 약관의 20대 젊고 가난한 시절, 아예 무명일 때 썼던 에세를 모은 책이거든요. 일본, 여성, 20대, 과거... 뭐 하나 쉽사리 공감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적잖게 난처함이 밀려왔습니다. 마치 애정 하는 작가님을 만나러 나갔더니 그 딸이 나와 앉아있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와 비슷한 입장에서 공감을 해야만 에세이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최근 읽은 누님의 에세이가 "무심하게 산다"였고, 그 책은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누님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예전 같지 않은 몸과 나이 듦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었기 때문에 나름 혼자 맞장구 쳐가며 기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그렇지'라며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제 온몸에 남아있어요. (물론 책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요...)

   그리하여 뭔가 생소한 젊은 시절 누님의 사랑 이야기며, 일상 이야기들이 마냥 헤벌쭉 하며 읽을 수많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에세이는 '잘 몰랐던 애정 작가의 과거를 알아간다'라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니 또 나름의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2. 그래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해"라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딱히 각 부마다 내용이 엄격히 구분되거나 하나의 테마로 칼같이 나눠진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에세이를 그렇게 정리해가며 읽을 이유도 없지만 말입니다. 

   1장 [밤 저편의 파라다이스]는 작가의 이십 대에 가지고 있던 사랑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훔쳐볼 수 있었습니다. 저와는 너무나 다른 애정관이라 마치 한때 유행했던 "기묘한 이야기"나 "서프라이즈" 같은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누님은 사랑을 정말 어렵게 해왔다고나 할까? 참 힘들게 산다 싶은 생각에 한숨도 쉬고, 피식 웃기도 하며 읽었습니다. 

   2장 [작은 것에 행복이 깃든다]는 일상 속에서 나름의 통찰이 담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중간중간 양념처럼 끼어드는 에피소드들도 깨알 같은 재미를 줍니다. 십오야에 얽힌 과거의 사건이 어른이 되어서야 밝혀지는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전혀 다른 기억임에도 독자 나름의 잊혔던 기억들이 소환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 나도 비슷한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되니까요.

   3장 [불완전한 낙원]도 전혀 새롭거나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사랑 이야기나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 과거 재미난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어쩌면 전혀 다른 경험과 기억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젊은 시절 이야기를 엮은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몇 가지 즐거운 포인트가 있었는데, 특히 즐거웠던 것은 지금 시점에서 알고 있는 작가나 작품의 내용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아하!'하며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핑크빛 안경"이라는 에피소드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인은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이 너무나 즐겁게 놀다 돌아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습니다. 후에야 슬픈 일을 그런 식으로 즐겁게 기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작가의 배경을 알고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에 수록된 작가의 단편 [신의 정원]을 읽어보면 어머니 장례식 장면이 이때의 기억을 토대로 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여주인공이 처음에는 친척들의 태도에 무척 화를 내는데, 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순간을 겪으며 이별의 순간을 즐겁게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이별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에 쓴 이야기와 훗날 작가가 쓴 작품이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때 무척 즐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20~30년 후에나 고민하는 기억력의 문제를 20대에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불완전한 낙원'에서 보면 나이가 들어서 건망증이 심해졌다기 보다 워낙 젊을 때부터 고질병이었던 것입니다. 이 누님은 그냥 건망증이 있는 인간인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에세이에 담긴 메시지들도 담백하고 좋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엮어서 읽다 보면 더욱 풍성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3. 버블 경제 후 대불황의 한가운데에 선 작가의 20대와 작금의 대한민국 청년들


   이 책은 작가의 20대 시절, 그러니까 역산을 해보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소위 버블경제라는 것으로 지표가 최상으로 치솟는 시기가 90년이고 이후 대 폭락을 경험합니다. 그리하여 에코 붐 세대라는 70년대 생들은 거의 정규직에 편입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아예 아르바이트만으로 살아가는 프리터족이 양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 작가 역시 소설가를 지망하는 가난한 젊은 시기를 지나갑니다.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먹거나 엄청나게 먼 거리를 차비가 없어서 걸어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 '돈이 없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상당히 놀랍습니다. 부모를 원망하거나 가난함을 깊이 한탄하지 않고 슬퍼하거나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소설가를 지망함으로써 정규직 군에 취직하지 않는)이었으며,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마찬가지로 가난했으므로 오히려 괜찮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함에 대한 낭만이 존재한다고 할까요? 

   저자의 젊은 시절 가난을 대하는 태도를 목도하고는 이 시대의 힘든 청년들이 절로 떠오릅니다. 저로서는 막연한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지금 우리 시대에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저자의 낭만적인 가난함과는 본질은 동일할지 몰라도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겪고 있는 큰 어려움은 절대적 가난도 있지만, 상대적 박탈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 힘든 정신적 어려움, 세대와 남녀 갈등처럼 대형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저자처럼 담담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겠지만, 어디 그리 녹녹한 일이던가요?

   이런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청년들의 박탈감은 사실상 청년들의 노력으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청년들이 각자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저 청년들끼리 경쟁에서 조금이나마 우위에 서서 아주 좁은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양지를 넓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언제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적이 없는 데다가 찬찬히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기득권 포기에 인색한 나라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회적 약자인 청년들의 문제가 해결이 될 리 만무하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해부터 학자금 대출 이자율 제한 같은 사회 초년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복지정책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것도 더 뜯어내지 못해 안달인 자본의 속성상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온갖 로비와 가짜 뉴스로 어떻게든 되돌려 놓으려고, 아니 더 많이 착취하는 구조로 바꾸려고 갖은 애를 쓰겠지요. 그러니 청년들도, 저도 우리 모두 세상이 돌아가는 고약한 원리에 대해서 조금은 더 의심하는 자세로 고민하고 "생각이란 것"을 해야겠지요. 

   영화 레미제라블의 말미에 등장하는 6월 항쟁 때의 장면이 기억납니다. 의연히 봉기하는 청년들, 그들을 외면하던 시민들, 처절하고 잔인하게 어린아이까지 학살하던 군인들의 모습. 청년들의 의식이 살아 있어야 시대가 나아갑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청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억지로 진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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