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형님은 널리 알려진 데로 완벽주의자이자 예민한 지성인의 면모를 뽐내다 보니 가뭄에 콩 나듯 잊을 만하면 하나씩 중, 단편을 발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리하여 한 올 한 올 온 정성으로 뽑아내는 이 형님의 소설이 모여 단행본이 될 때까지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소설집이 나왔는데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17년 만의 후속작이라고 하니 거참, 그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출간이 된 것도 알고 사기도 했는데 읽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거의 몇 년씩 삭힌 묵은지 같은 느낌으로 한 편 한 편을 써내니 애정 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후루룩 읽기엔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속 소설 내용이나 여러 인터뷰와 강연 등을 통해 밝힌 테드 창의 작품 세계는 인류와 우주를 포함한 세계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깊이 있는 사고실험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만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데다가 각 이야기들이 우아한 작품성을 품고 있습니다. 하드 SF를 추구하는 독자는 물론 소설의 서사적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까지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SF 소설이든 SF 영화든 소위 장르소설(영화)의 경우 평론가 집단과 독자(관객)의 평이 상반되는 경우를 무척 자주 볼 수 있는데, 테드 창의 경우는 그럴 일이 없어요. 전문가고 일반인이고 오로지 찬양하기 바쁩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은 격 이지요. 이렇게 갈수록 형님의 위상이 높아지다 보니 현존하는 최고의 SF 작가라는 평을 받으며 신계에 오른 것입니다.
신간 "숨"은 이 횽님이 추구해오던 "어려운 주제와 참신한 설정, 미래와 과거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교차되는 서사 구조, 개인적 관점으로 풀어내는 독자 친화적 이야기 구축 방식" 등 기존에 보여주던 창 형님의 스타일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소설집입니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독자들의 갈증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을 작품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 살아 숨 쉬는 듯 유연하게 인류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
테드 창 형님은 각 작품들마다 흥미로운 설정을 통해 독자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실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인지 본인에게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임은 분명합니다.
※ 이하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작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는 특정한 시점의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간의 문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바꿔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 발짝 더 나가 미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럼에도 시도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SF에서 흔히 다루는 시간 여행과 타임 루프의 문제를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를 접목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는 등 테드 창 방식으로 독특하게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는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표제작 [숨]은 인류가 공기의 흐름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동작하는 휴머노이드로 설정하고 그 원동력이 되는 기압의 변화에 따른 인류의 향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엔트로피의 문제는 닫힌 세계에 놓인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원리를 밝혀내는 셀프 수술 장면이 독자들을 압도하는 수작입니다.
극히 짧은 분량의 내용만으로 독자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대표적인 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만나보기 힘든 시간적 네거티브 피드백을 활용해 인간 행동의 결정론적 관점을 제시하고 이럴 경우 인간들이 취하는 반응과 의미에 대해 고찰합니다. 핵심적인 표현만으로 테드 창 형님의 평소 관심사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적잖이 생소했지만 AI 시대에 이르러 상당히 익숙한 개념이 된 학습형 인공지능과 플랫폼의 변화에 따른 소프트웨어의 생애 주기와 관련된 인간의 관계 문제를 흥미롭고 깊이 있게 다룬 "소트프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재독하니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미 단독으로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집에 수록된 이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아이의 성장에 있어 인간과 기계의 애착 관계, 인간 접촉의 필요성 여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저자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쓴 소설보다 결이 조금 다릅니다. 말미의 창작 노트를 통해 조금은 특수한 상황에서 쓰게 된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은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감안할 때, 디지털 환경에서 완벽한 기억능력과 기억 재생 기술을 부여받은 인간들의 정서와 태도에 미치는 변화와 그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읽기에도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독특한 형식의 소설 [거대한 침묵]은 왜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린 인간의 흔적들에 대해 우주적으로 이렇다 할 답변이 없는지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하는 실험적인 소설입니다. 왜 실험적인 소설이 되었는지 창작 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입니다. [옴파로스]는 과연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 우주의 중심인 옴파로스가 맞는가? 자문하는 작품입니다. 주변에서 종종 '하나님이 위대한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시련을 주신다'라는 고백을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면, 과연 온 우주를 주관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이 나 하나를 위해 그리 깊은 애정을 쏟는다는 것이 합리적인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 소설은 신이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근거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SF의 단골 소재인 다중 세계를 소재로 양자역학의 이론을 접목해 이야기를 구축한 작품입니다. 거시적인 거대담론에 그치지 않고 다중 세계와 다수의 도플갱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선한 행동의 의미에 대해 고찰한 수작입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단 한 작품도 각 작품만의 고유의 설정과 주제의식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작품이 없을 만큼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소설집을 아우르는 흐름이 매우 좋습니다. 어느 분야건 장인의 경지에 오르면 무리하지 않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처리하는데도 결과물이 놀랍게 훌륭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소설집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척 어렵고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면서도 우아하고 여유 있게 처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형님은 그 와중에 자신감 넘치는 노련함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재미있으면서도 고급진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독자들의 반응이 놀랍다는 찬양 일색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걸작 SF 소설
저 역시 이 소설과 창 형님에 대한 찬양의 반열에 기꺼이 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드 SF라는 장르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보니 다수의 대중 독자에게는 어렵고 재미없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매한 것이 보통 이름값이 높은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아주 재미있게 읽으시면 참으로 다행인데, 생각보다 별로인 독자의 경우 대놓고 별로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괜히 나만 이해를 못 하는 멍충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은 자기검열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정말 그렇게 미친 듯이 재미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네임밸류 때문에 별로라는 반응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내용,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하는 지적 자극을 주는 소설을 싫어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냥 먹고살기도 힘든데 소설까지 고민하며 읽어야 하냐? 뭐 이런 태도겠지요. 그래서 하드 SF의 경우는 실제로 읽어내는 독자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테드 창 형님의 문학적 재능 때문에 SF가 신화적으로 읽어지다 보니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받아들일 여지가 많아서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대중적이기 힘든 장르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정말 고급 진 하드 SF의 맛을 느껴보시고 싶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후회 없으실 소설인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집의 많은 분량을 중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테드 창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이 이미 지적하신 부분 같지만 테드 창 형님의 팬이라면 북스피어에서 출간된 버전으로 이미 읽으셨기 때문에 굳이 반복해서 수록된 것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집 하나를 놓고 볼 때 포함되는 것이 흐름도 좋고 더 풍성해져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간 중편으로 채워졌다면 더욱 좋았을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