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발다치 "죽음을 선택한 남자" 책 리뷰
데이비드 발다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의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라는 훌륭한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좋은 캐릭터인 만큼 한편의 소설로 끝내기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기대대로 시리즈로 계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폴른 : 저주받은 자들의 도시]가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시리즈 세 번째 소설인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시리즈는 순서대로 안 읽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이 조금 있습니다.
모기남 시리즈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독보적인 캐릭터 "에이머스 데커"에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대신 모든 기억을 잊지 않는 남자가 된 데커는 기억이 남달라 한번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버립니다. 이런 캐릭터를 잘 잡았기 때문에 사건을 만나도 특별하게 풀어나갈 수 있어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결국 해결해내는 절정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캐릭터의 특징은 독자 입장에서는 좀 반칙이기도 한데, 솔직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저걸 어떻게 알아내?'라는 의문도 '모든 걸 다 기억하니까 뭐...'라고 넘어갈 수 있는 명분이 됩니다.
이런 주인공은 인간미가 떨어지고 애정을 주기가 어렵기 마련인데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한 반면 정서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겨 사회성이 없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설정을 부여함으로 해결합니다. 독자는 캐릭터를 미워할 수 없고 안쓰럽기까지 한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되어 캐릭터의 묘한 매력이 배가되어 다가옵니다. 가족도 다 잃었는데 사회성 결여까지 있으니까 어찌 안쓰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지루해지려고 할 때마다 한 번씩 목숨의 위협을 받는 린치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이거 좀 안일하게 흘러가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든다 싶으면 여지없이 두드려 맞거나 잡혀가거나 총알 받이 신세가 되거든요. 물론 여러 조력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결국 구출됩니다만, 소설이니까.
데이비드 발다치는 법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법조계에 있어서인지 소설에서도 디테일이 상당히 좋습니다. 일반인들이 상세하게 알기 힘든 부분을 아주 그럴듯하게 그리고 있어서 생동감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범죄 스릴러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엄청난 강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처음 쓴 소설 "앱솔루트 파워"는 아직 출간되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만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모양입니다. 습작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겠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명의 주인공이 계속 등장하는 시리즈 소설의 경우 대체로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방식은 장단점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의외로 반복되는 패턴을 좋아합니다. 스릴러 소설은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와 통찰력을 얻겠다는 기대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편안하고 흥미롭게 읽히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유사한 패턴에 같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야말로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읽기 편안합니다.
한편, 반복되는 패턴 속에 적당한 수준의 변주가 일어나지 않으면 금방 식상해지고 지루해지기 일쑤입니다. 늘 속편이 첫 편만 못하다는 평을 받는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리즈 특유의 스타일과 패턴은 유지한 채로 약간의 변화와 잔재미, 강렬한 반전 등이 버무려지면 만족도는 수직 상승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발다치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지점을 정확히 잘 알고 있는 작가입니다. 일반인들이 상세히 알기 힘든 분야의 거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도 등장인물 간의 인간적인 고뇌와 관계의 다양성을 적절히 분배해 큰 사건 속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가기 때문에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고, 독자의 감정이입에 큰 도움이 됩니다. 테드 창 형님이 어려운 SF를 쓰면서도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 없도록 하는 기술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시리즈의 전편과 유사하게 "죽음을 선택한 남자" 역시 거대한 음모의 틀에서 미궁의 사건이 발생하고 조금씩 사실에 접근해 갈수록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와 충격이 매우 촘촘하게 설계되어 차근차근 펼쳐집니다. 이야기에 한 번 뛰어들면 중간에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를 치밀하게 전개해 나갑니다. 개인적으로 반전을 좋아하지 않고 짜릿한 만족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반전은 상당히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들고 반전을 반복하는 구조가 매력적이지 않게 느낄 독자도 있을 것 같지만,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키는 소설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취향이라는 것은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넓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찾아서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시리즈에 등장한 캐릭터의 임팩트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작품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는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의 탄생이 화려하게 다가왔으니 좋았습니다. 두 번째 "괴물이라 불린 남자"에서는 데커만큼 매력적인 멜빈 마스가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쌍두마차 역할을 해 반가웠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FBI에 속한 데커의 팀 외에 군 소속 정보기관 DIA의 여성 캐릭터 하퍼 브라운이 등장합니다. 대체적으로 멜빈 마스의 여성 버전 같은 느낌의 캐릭터입니다만 등장이 그래서인지 독자 입장에서 아주 정이 가는 캐릭터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 강렬한 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등장할 만한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괜찮은 캐릭터지만 데커나 마스 정도의 임팩트는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하퍼 브라운의 경우는 너무 전형적인 설정이다 보니 공감을 느끼기 힘든 경향이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고 능력도 출중하고 알 수 없는 내력과 히스토리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른바 "다 가진" 캐릭터입니다. 이미 매력적인 주인공과 조력자들이 충분히 있어서 사실 새로운 캐릭터가 어떠니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뉴 페이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 궁금해집니다.
한편, 전체적으로 상당히 큰 스케일의 음모를 하나의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파헤쳐 나가는 이야기다 보니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재미는 큽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지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흥미롭지만 지친다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묘한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차기작을 찾아 읽을 생각이기 때문에 역시나 좋은 쪽으로 더 기울어지기는 합니다만 저는 데커만큼 기억력도 좋지 않고 머리도 나쁘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라는 의문으로 스토리를 쫓아가는 방식이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데커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느낌으로 책을 읽으니 원...
그럼에도 훌륭한 설정과 전개, 실망시키지 않는 결말까지 완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이미 출간된 시리즈 네 번째 시리즈도 곧 읽고 싶습니다.(라고 하고 1년 후에 읽게 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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