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고대 사회에서 피지배층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눈 하나를 제거했다고 한다.
지배층에 의해 눈 하나를 잃은 사람을 ‘민’이라고 했단다.
대한민국의 ‘민’은 이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농민, 어민이라고 한다고 이 나라는 ‘민’의 나라라고 한다.
어느 유튜브의 내용이다.
폭력의 뿌리는 ‘너를 지배하겠다’일까?
‘너를 먹겠다’ 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북어와 여자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부드러워진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 따위의 말들에
내장 깊이 스며 있는 폭력성이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나 있다.
영혜는 아마도 아버지의 전 여자, 피해자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목에 허리띠를 묶어 끌고 다녔다는 예전 세라피스트 모임의 사례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 그 폭력의 끔찍함을 보지 못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에서도 그랬다.
일상의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다 겪었을 일들 때문에 빙의가 된 주인공이 의아하였다.
시간이 흐른 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위협과 폭력에 익숙하다는 것을 희미하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자녀를 향해 위협과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들은 폭력성에 무디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어머니들에게서 자란 아버지들의 폭력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역동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라는 책에서 더 날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목사인 친부에게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성폭력을 당했다.
친부의 아이를 임신했고 낙태했다.
친 조모에게서 오줌을 강제로 마시게 하는 등의 학대를 당하였다.
친모는 방관했고 동조했다.
영혜는 먹는 것을 거부한다.
잔혹한 폭력의 뿌리를 아이는 알고 있는가 보다.
어디로도 도망갈 곳 없는 아이는, 얼어붙어도 투명 해져도 잔인하게 사냥당한 아이는,
살과 피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외엔 선택이 없었겠다.
민감함이 삶이다.
무감각이란 폭력의 산물이며 그 자체가 폭력을 내포한다.
그러나 무감각을 포기할 때 몰아치는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영혜처럼 땅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보다.
엠뷸런스가 도착한 곳에서 영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가 바라던 대로 가랑이에서 꽃이 피었길,
죽은 잎들을 떨구고 생명 가득한 나무가 되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