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배냇저고리 앞에서

한강 '흰'

by Rumina


이 책의 글들은 아득히 먼 나라의 언어 같다.

느낌은 오는데 명확히 알아먹을 수 없는 외국어 같다.

전체의 그림이 어렴풋이 그려지다 가도 이내 부서져 흩어진다.

조각으로 박힌 그림들을 꺼내어 모국어 위에 올려놓는 일이 어렵다.


섬세하게 조각된 언어들 속에서 나는 문득 친할머니를 생각했다.

눈물로 일그러진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의 깡마른 어깨를 한 번쯤 안아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처음 해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 아버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외할머니도 생각났다.

큰 이모를 외할아버지가 묻었을까 처음으로 궁금했다.

아기 때 죽은 고모는 친할아버지가 묻었을까.

죽은 자식을 안고 산으로 올라가는 걸음이, 땅을 파는 손길이,

흙을 덮는 표정이 어땠을지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으면서

궁금한 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까만 눈을 열어 희미한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오지 않는 젖을 겨우 빨고,

피 묻은 몸 씻지도 못하고 하얀 배냇저고리와 차가운 땅에 묻힌 아이는

가장 낮음으로 높게 오는 신일까 생각되었다.

그 하얀 배냇저고리 앞에 나는 한없이

잘못하였고 잘못하였고, 잘못하였다.


내가 먼 도시들을 배회했을 때는 이런 속살의 아무것도 모른 채였지만,

그 길들을 걷고 또 지금 이 길을 걸으며

내 어깨에서도 누군가의 어깨가 빠져나갔을까.

누군가의 차가운 손길도 스쳤을까.

그리하여 다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의 하얀 배냇저고리를, 혹은 하얀 수의를 나도 태워드릴 수 있을까.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 그들의 얼굴을 방긋 보고

짊어져야 할 것들을 새롭게 지고,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애초에 짊어져야 할 것도, 가야 할 길 따위의 것들도 없었다는 걸

가슴으로 알게 될 수 있을까.

책 속 언어들이 전해주는 무엇들에 기대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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