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by Rumina

이곳에 있을 때, 저곳이 그립다.

늘 가지 못한 길이 아쉽다.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다.

닿고 싶으나 갈 수 없다.

몸은 여기에 있으나 정신은 꿈꾸듯 다른 곳을 헤맨다.

직장인 버전으로 말하자면, 출근하면서 퇴근하고 싶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집의 소파에 누워있다.

아직 먼 주말에 미리 마음이 가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열상태이다.

이러한 분열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자 프로이트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빌헬름 라이히'는

도덕적 관념에 의해 억압된 성에너지가 신경증을 만든다고 하였다.

성 에너지는 인간의 근본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단지 성적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생명력의 억압인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신경증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억압에 의해 무언가 훼손된 상태인 것이다.


분열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 안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지금 이곳에 있고 싶은 나, 저곳으로 떠나고 싶은 나, 상처받을까 두려운 나, 무엇이든 과감하게 질러버리고 싶은 나.

제각각의 감정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충돌한다.

내면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서로 엇갈릴 때, 어떤 결정을 해도 만족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불완전한 느낌을 받게 된다.

둘째, 우리는 결핍과 충족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잃을까 두려워지고, 가지지 못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핍을 채우려 애쓰지만, 그것은 완전한 충만함을 주지 않는다.
금세 다른 결핍을 찾아 나선다.

만족이 곧 새로운 결핍을 부르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대편을 바라본다.

셋째, 삶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다.
인간은 확장하려는 힘과 머물고자 하는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강물이 고이면서 흘러가듯,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안정을 원하고, 안주 속에서도 성장을 꿈꾼다.

이 두 가지 욕망이 서로 상충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늘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는 마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 '분열을 없애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내 안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평화가 시작된다.

'내 안에 이런 갈등이 있구나.' 하고 가만히 바라볼 때,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된다.

둘째, 머릿속 생각이 충돌할 때, 몸의 감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몸이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지켜보면, 지금 '여기'가 더 선명해진다.

그러면 저 멀리 있는 욕망이 조금 덜 시급해지고, 자신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셋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러 감정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을 받아들일 때, 자유로워진다.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며 '저곳'을 동경하지만, '이곳'을 사랑하는 순간 저곳을 향한 절실함은 사라진다.

지금 이 순간, 작게라도 충만함을 느껴보는 연습을 한다.

앞에 있는 따뜻한 커피 한 잔, 부드러운 햇살, 숨 쉬는 순간의 미세한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은 차오를 수 있다.
이렇게 '여기'를 사랑할 때 분열은 자연스럽게 녹아내린다.


분열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곳'을 향해 있는 존재이다.

이 모순은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덕분에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더 깊고 넓어져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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