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보험 구매 심리의 정체

by 낭만닥터진사부

우리 한번 그 순간을 떠올려볼까요?

암이 걸릴 것 같아서 보험을 들었는지? 아니면 암이 걸리면 안 되는 상황이 있어서 들었는지

잠깐 그 장면을 떠올려볼까요?


13년간 상담석에 앉으면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을 수백 번 했습니다.

"왜 보험을 가입하려고 하세요?"

단 한 번도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암 발생 확률이 높아서요."

"통계를 보니 36%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다 못해 이런 말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 학비가 아직 남아서요."

"대출이 있어서요."

"저 없어지면 남편이 혼자인데."

"부모님이 아직 의지하시거든요."


"대부분은 걸리면 돈 많이 들잖아요~~~"

"다들 하나씩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그 말들을 들으면서 계약서를 펼쳤습니다. 그때는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보험사의 진짜 수익은 보험금이 아닌 당신의 보험료 운용에서 나옵니다. 그 구조를 여기까지 함께 살펴왔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가 작동하려면 먼저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당신이 보험을 사야 한다는 것.

오늘은 우리가 보험을 사는 진짜 이유에 이름을 붙이는 날입니다.


공포가 먼저였습니다

10편에서 살펴본 숫자를 떠올려보세요. (10편 참조)

20세에서 60세 사이, 암에 걸릴 확률은 12.85%입니다. 87.15%는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보험 가입률은 86%를 넘습니다.

12%의 발생 확률에 86%가 반응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일일까요? 이상한 일일까요?


현재가지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발생 확률이 낮아도 그 12%가 내게 일어났을 때 감당할 수 없다면, 사람은 그것을 막으려 합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사고 확률이 낮아도 안전벨트를 맵니다. 화재 확률이 낮아도 소화기를 삽니다. 가능성이 낮다고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을 때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대비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험을 산 이유가 "발생 확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일이 생겼을 때 우리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였다면 — 그 이유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잃는 게 더 아프다(손실회피, Loss Aversion)입니다.

손실의 고통은 같은 크기의 이익이 주는 기쁨보다 약 2.5배 강하게 작동합니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수십 년의 연구로 밝혀낸 구조입니다.

아이 사람들은 돈이 남아돌아서 보험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아이 학비가 사라지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에 또는 소비가 이미 꽉 차있는데 비용이 없어 치료를 못할까 봐 산 것입니다.


11편_img1_보험구매심리구조.png

설계사가 건드린 것

저는 상담석에 앉아서 "암 치요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아세요?"라고 말할 때, 고객의 표정이 바뀌는 걸 수백 번 봤습니다.

그 표정이 바뀌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두 가지 편향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최근 본 게 전부처럼 느껴지는 심리(가용성 편향, Availability Heuristic)입니다. 주변에서 암 진단 소식을 들은 직후에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실제 확률보다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혹시 지인의 암 소식을 들은 직후에 보험 상담을 받으셨던 적 있으신가요?


두 번째가 손실회피입니다. 설계사가 하는 말은 항상 같습니다.

"그때 치료비가 없으면 어떡하실 건가요?"

치료비가 생기는 상상이 아닙니다. 치료비가 없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이 판매 기술이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이건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설계사 교육 과정에는 이 편향의 이름이 없습니다. 저도 13년을 보험 현장에서 보내고 나서, 재무학과 행동경제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 표정이 바뀌는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배우지 않은 것을 알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잘못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설계된 구조에 자연스럽게 반응하신 겁니다.

그런데 구조를 알게 되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11편_img2_손실회피편향해설.png

이름을 알면 달라지는 것

예를 들면, 명의가 처방한 약이 서랍에 있어도 먹지 않으면 낫지 않습니다. 처방전이 있다는 것과 나았다는 것은 다릅니다.

편향의 이름을 아는 것도 비슷합니다. 이름을 아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름을 모르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음번에 설계사 상담을 받게 되실 때, 아마 이런 말을 듣게 될 겁니다.


"요즘 치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아세요?"

"주변에서 이런 일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이 보장이 없으면 나중에 후회하실 수 있어요."

그 순간, 이제 여러분은 이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 실제 발생 확률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에 대한 공포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공포는, 잃는 게 이득보다 2.5배 아프게 느껴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구조라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떻게 질문할 수 있을까요?


"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얼마인가요?"

"그 금액이 없을 때 국가가 어떻게 지원해 주나요?" — (13편에서 다룹니다)

"이 보험료만큼의 보장이 저에게 정말 필요한 건가요?"


사실 이건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국민 78명당 설계사가 1명인 나라에서, 설계사는 판매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수수료 구조로 움직입니다. (3편, 4편 참조)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압니다.

공포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다음 상담에서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공포에 따른 손실회피 편향이라는 이름을 아셨습니다.

핵심요약.png

그 공포로 산 보험이 실제로 적정한 양인지 숫자로 확인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확인하셨다면, 다음 편은 필요 없습니다.

→ 12편: 나는 매달 얼마를 과잉으로 내고 있는가?


참고 출처

행동경제학 손실회피 이론: Kahneman, D. & Tversky, A. (1979). Prospect Theory: An Analysis of Decision under Risk. Econometrica

가용성 편향: Tversky, A. & Kahneman, D. (1973). Availability: A heuristic for judging frequency and probability. Cognitive Psychology

국가암정보센터 / 보건복지부 2023 국가암등록통계 (10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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