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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Sep 25. 2024

조금 다른 도시여행, 고색뉴지엄

폐수종말처리장의 변신


사위어가는 존재에게 보내는 안부

"왜 그런 시골로 이사를 가?" 서울에서만 살다가 몇 년 전에 수원의 광교 신도시로 이사 올 때 누군가 내게 물었다.  수원 화성이 가까이 있고, 신분당선이 연결되고 광교호수공원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말 밖에는 솔직히 대답이 궁했다. 물어보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서로 수원을 잘 몰랐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알아볼 필요가 생겼다. 그렇게 찾아간 몇몇 곳 중 하나가 고색 뉴지엄이다.



전에 영국 런던을 여행할 때 인상 깊었던 미술관이 있다. 가동이 멈춘 화력발전소가 미술관으로 탈바꿈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다. 그곳이 떠올라 고색 뉴지엄을 찾게 되었다. 원래는 폐수처리장이었는데 폐수 배출이 없는 전기, 전자 등의 첨단산업이 들어오면서 한 번도 가동되지 않은 채 10여 년간 방치되었던 곳이다.


수원 도심을 벗어나 푸른 녹지가 펼쳐지는 외곽으로 차를 달렸다. 군용기가 하늘 위로 자주 지나고 공장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수원델타플렉스(구 수원산업단지) 안쪽에 있는 건물이었다. 고색 뉴지엄에 도착해 보니 막상 규모가 테이트 모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데다 전시된 내용도 적었다. 차로 30분 넘게 달려온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1층에 1700년대부터 시작된 수원의 상업과 농업의 변천사 등을 사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기록 공간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1층의 기록 공간과 지하 1층의 전시 공간에 다섯 명의 신진 작가들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시 공간에 어떤 전시가 펼쳐질지 궁금해서 2주 사이에 세 번씩이나 찾았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자주 가는 단골 가게처럼 정이 들어 안내 직원과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보다 많은 시민이 그곳을 찾도록 계속해서 변신을 꾀하는 중이었다.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열어주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검은색 철제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독서 공간과 안내 데스크가 꾸며져 있다. 전시가 없는 기간에는 수원의 역사와 박물관 정보, 수원 화성과 고색 뉴지엄 근처의 동네(서둔동, 탑동, 고등동 등)에 관한 책들을 비치하고 중앙에는 의자를 놓아두었다. 안내 직원의 말에 의하면, 여름이면 인근 근로자들이 더위를 피해 들어와 이 공간에서 잠깐씩 쉬어간다고 한다. 나도 둥근 의자에 앉아 수원에 대한 책들을 뒤적이며 광교에서 멀리 떠나온 여행자의 기분을 누렸다.

한쪽에는 세월의 밀봉을 뚫고 나와 눈이 부신 듯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두 개의 폐수 처리용 약품 탱크가 빛나고 있다. ‘고색동 이야기’라 적힌 탱크에는 지명의 유래와 옛 지도가, ‘고색의 삶과 흔적’이라 적힌 탱크에는 고색동의 찰흙과 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십 년의 적막함이 가득 담긴 두 대의 폐수 처리 탱크를 보면서 상상했다. "우리는 쓸모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고색의 역사를 알리는 중이야."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풍경을.






탱크 사이로 하얀 타일로 꾸민 기다란 복도가 보인다. 중간에 과거의 폐수처리장 시설인 배관이나 배수펌프가 보존되어 있는데 처음 보는 풍경이라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 유리문을 여니 전시 작품 사이로 당시의 시설물들이 남아있다.


그곳에 잠겨있던 오랜 시간을 한 겹 한 겹 벗기는 기분이 들었다. 깨진 콘크리트 사이로 삐져나온 철근들이 마치 자식들에게 뭔가 멋져 보이고 싶었으나 세월에 밀려난 우리네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를 떠올리게 한다. 손이 닿는다면 먼지라도 쓸어주고 싶었다.


안쪽에 있는 통창으로 쏟아지는 빛의 다정함을 느끼며 차분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라면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무심하게 버려지고 소외되는 사물들을 '다시 바라본다'는 주제의 전시를 둘러보았다. 보면서 그리워서 찾아가면 위안을 얻는 공간으로 고색 지엄을 마음에 새겼다.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매력적인 장소가 도시. 수원에서 사는 게 즐거워졌다고 비로소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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