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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여행도

여행에세이

by 지유


이래서 빚지고는 못 사나 보다. 원래 우리의 여행은 3월에 떠날 예정이었다. 친구 H와 봄볕이 물감 풀어지듯 따뜻할 무렵에 태국 치앙마이로 가자 했었다. 치앙마이로 출발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어머님은 영면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뺨을 비비며 애쓰셨다고, 이제 편안하게 쉬시라 말할 수 있어 내게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큰 손해를 보면서 예정된 치앙마이행을 취소했으니, 한껏 부풀어 있던 H의 기대감이 ‘푸르르’ 풍선 바람 빠지듯 꺼졌으리라. 그럼에도 H는 치앙마이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더 큰 일 아니었냐고 나를 위로했다. 그 일로 나는 그녀에게 커다란 마음의 빚이 생겼다.


여행을 미뤘으나 이런저런 일들을 치르고 6월이 돼서야 겨우 떠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정작 6월의 치앙마이는 우기에 접어들었다. 여행 일정이 연기된 것도 미안한데, 우기까지 왔으니 더 미안하게 되었다. 결국, 방향을 틀어 베트남의 다낭으로 가기로 했다. 다음은, 여자 둘이 위험하게 자유여행을 어떻게 가느냐는 H 남편의 성화가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여러 번 다녀와서 눈 감고도 훤한 다낭을 패키지여행으로 예약했다. 나 때문에 어그러진 여행에 무슨 토를 달겠나. 게다가 동남아를 여행하기 딱 좋을 3월을 지나 하필 무덥기 그지없는 6월이 되었으니, 그녀의 남편이 H를 업고 가라면 업고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H와 나는 송파에 있는 아파트에 살 때 서로의 앞집이었다. 나와 동갑인 그녀는 밝고 활기찬 데다가 붙임성이 좋아서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으며 예의가 발랐고, 신세를 지면 꼭 갚아야 하는 성품이 좋았다. 우리는 매일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석촌호수를 같이 돌기도 했다. 호수를 돈 후 함께 마신 맥주를 모았다면, 아마 작은 웅덩이 하나는 파고도 남을 것이다. 내게 힘든 일이나 고민이 생겼을 때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H가 때로는 멀리 사는 친언니보다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때가 2007년이니 어느덧 두 해만 지나면 20년이 되는 인연이다. 몇 년 전, 내가 먼 신도시로 이사를 온 후로도 만남은 계속되었다.


다낭으로 자유여행을 간다면, 기차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달려 옛 베트남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성도 보고, 숙소에서 안방비치 가는 길목에 있는 로컬 식당까지 잘박 잘박 걸어 모닝글로리에 볶음밥을 먹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가 없지만, 조식이 맛있고 방마다 열대식물 울타리가 창문을 가리던 초록빛의 숙소 다이안 푸 빌라에 묵으려던 계획도 무너졌다. 거기 자그마한 수영장이 아담해서 수영하기 좋아하는 H와 매일 물놀이를 했을 텐데…. 아무렴, 어차피 이리된 거 마음 편히 즐기자고 나는 마음먹었다. 다낭 기온이 35도라는 일기예보에 어느 책에선가 읽은 ‘더위는 이겨내는 게 아니라 담담히 받아들이는 거’란 말로 단단하게 마음을 무장했다.


사연 많은 패키지로 다낭에 도착한 늦은 밤에 우리는 호텔 입구에 있는 야외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호텔 앞은 한국과 이름이 같은 한강이 흐르고, 용트림하는 용이 화려하게 장식된 다리가 빛나는 곳이었다. 그녀에게 우여곡절 끝에 다낭에 온 걸 사과하려 나의 어머니 장례식 얘기부터 꺼냈다가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 말을 듣던 H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H는 이해한다며 우리가 어찌할 수 있던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녀의 눈가를 못 본 척했지만 잔잔한 물살 위에 같은 배를 타고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단체로 다녀야 하는 패키지인데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었다. 다낭에서의 시간이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빚진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영흥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프면 사원에 가요.”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행복하게 죽어간답니다. “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당장은 아프고 힘들어도 다음 생을 생각하며 오늘을 견디겠지. 다음 생에는 잘살게 될 거라고, 잘못된 삶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위안하는 마음은 왠지 간절하게 느껴졌다. 꽁꽁 언 겨울 흙을 비집고 나오는 연한 새순처럼 애틋하고 아련했다. 사실 가이드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거리에 보이는 사원들은 그저 흔한 사원이었다. 현지에서 그곳 사람들과 오랫동안 지내온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숙연하게 마음에 닿으면서 사원이 왠지 특별하게 다가왔다.


저녁을 먹으러 갔던 베트남 가정식 식당에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와 있었다. 늘 조심스럽고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일본인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큰 소리로 떠드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들도 일상이 아닌 여행이니까 늘 삼가고 조심하던 마음이 무장해제된 순간이겠지, 그런 게 여행의 매력이겠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놓이면 긴장하고 경직됐던 마음이 오히려 풀어지나 보다. 중년에 만나 어느덧 환갑을 된 H와 나도 나이를 잠깐 잊었다. 발랄하게 앞서 걷다가 “나 불렀어?” 하며 뒤돌아보거나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둔 채 소녀처럼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호이안의 낡은 건물 틈에 흐드러지게 핀 부겐베리아와 빨강 노랑의 색등처럼 기분이 환해졌다. 등 뒤로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 물보라를 만난 듯이 명랑하게 웃으며 여행에 빠져들었다.


“왜 패키지로 가요?” 묻는 이가 있었다. 아마 패키지여행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나 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묻는 이도 처음 보는 사람과 대형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짧은 자유 시간에 쫓겨 보고 싶은 곳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왔던 경험 때문이리라. 쇼핑센터로 데려가 문을 꽉 닫은 방에서, 관심도 상관도 없는 건강 상식에 대해 들어야 했을 것이다. 다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쳐주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주장하는 ‘만병통치약’을 사야 했을 것이다. 안 사고 버티다가도 가이드가 힘들다고 읍소를 하면 모질지 못해서 결국 지갑을 열었겠지. 꼭 필요하진 않지만, 그중 가격이 만만한 노니 치약이든 팔찌라도 집어든 적이 있어서 그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패키지여행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친구에게 빚을 진 여행에 무게나 밀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주로 리조트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해변을 산책하고, 바람이 잘 스미는 해먹에 누워 단잠을 자는 정도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거대한 불상이 있는 영흥사와 호이안의 떤끼고택까지 들어가 봤다. 오행산 동굴의 지옥도를 본 한국의 영화감독이 영화 ‘신과 함께’를 만들어 흥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별장이던 유럽풍 테마파크 바나힐이 높은 산 위에 지어져, 바람막이를 입을 정도로 시원한 것도 뜻밖이었다. 패키지 일행과 함께 싱싱 달리는 버기카를 타고, 신나는 한국 가요를 따라 부르는 야간 투어도 흥에 겨웠다. 조곤조곤 잔잔했을 둘만의 여행이 패키지 일정 덕에 발랄하면서 시끌벅적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다행히 H도 즐거워 보였다.



바나힐로 향할 때 가이드가 말했다. “패키지는 남한테 폐 끼치지 말라고 패키지예요.” 피식 웃었지만 맞는 말이다. 자유 시간 후 돌아오라는 때보다 늦어서 기다리게 하거나, 차 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식당 종업원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일행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다. 게다가 모르는 이와 겸상을 한 채 취향과 전혀 다른 식사를 하는 일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여행을 위해 누군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거나, 참고 견디거나, 여행비용을 모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집이나 직장에서 자신의 빈자리가 불편하지 않으면서 한편 불편해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랄 만큼의 일들을 미리 처리하고 왔으리라. 그렇기에 자유 여행이든 패키지든, 재미없거나 시시한 여행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여행 일정이 계속되면서 H에게 진 빚을 갚는 게 아니라, 어느새 여행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관광객을 태운 나룻배가 강을 가득 메우고, 호이안 올드타운의 색등이 강물에 비쳐 꽃밭처럼 화사한 저녁이었다. 하늘에서 시작된 붉은빛이 빠르게 번져가는 투본강 가에서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기다란 대나무 끝에 달린 망 속에 촛불을 켠 종이 연꽃을 담아, 둘이 손을 맞잡고 살포시 강물에 띄우며 소원을 빌었다. 그곳의 오랜 시간만큼 이끼가 낀 붉은색 지붕 아래 노란색 벽을 가진 고택의 처마에도 소원처럼 불이 켜져 있었다. 멀어지는 종이 연꽃을 지켜보는데 다정한 불빛들과 뜨거운 바람이 우리를 휘감으며 지나갔다. 다낭에 올 때마다 매번 호이안에 들렀으면서도 처음 해본 일이었다. 사는 동안 그 순간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전에는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호이안 밤거리의 식당이나 카페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구성진 기타 소리도 낭만적으로 들렸다. 기타를 연주하는 악사의 동네 아저씨처럼 편안한 슬리퍼 차림도 재미난 풍경이었다. 극장에서 본 베트남 전통 의상 아오자이 쇼도 꽤 인상적이었다. 출연자가 연극인 듯 뮤지컬인 듯 노래를 하다 말고 갑자기 정색을 한 채 날개 같은 옷을 펼치면서 모델 워킹으로 걸어 나오고, 그 와중에 다른 출연자는 쟁반에 담은 베트남 전통주를 맛보라고 한 잔씩 나눠주는 퍼포먼스였다. 시골 장터처럼 어수선하면서도 왠지 정겨운 풍경이었다. 패키지여행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구경이었다. 패키지 일정의 끝이 다가올수록 원래 계획했던 자유여행이 그다지 아쉽지 않게 되었고, H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다낭에서 돌아온 날, 인천공항으로 데리러 온다는 남편을 기다리느라 다시 공항의 출발 층으로 올라갔다. 며칠 전 패키지여행에 대한 걱정을 속으로 안고 서성이던 자리였다. 다행히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전에는 알지 못하던 영흥사, 바나힐을 만나고 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서도 볼 수 있는 곳들. 자리를 지키는 모든 것에 경의를 표하며 나의 자리를 생각했다. 친구, 아내, 엄마, 딸, 작가라는 이름까지. 우여곡절 끝에 떠났어도 친구 자리를 지켜준 H에게는 미안한 마음 대신 고마운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에겐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이 얻어 온 생각과 추억도 듬뿍 생겼다. 가끔 함께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여행의 조각들 말이다. 뻔한 패키지면 어때, 좋은 친구와 함께한 여행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고 결국 우리는 조금 더 친밀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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