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발단

시 쓰는 여행가

by 지유


버스정류장 벤치 아래 다소곳이

놓인 초록색 청하병 하나


지난밤 어느 고단한 생이

갈증 난 마음에 물을 주었을까


온종일 버스가 멈췄다 떠나는 정류장은

복화술처럼 되뇌는 하소연과

아무도 모르는 한숨이 배어있는 곳


어떤 시름은 너무 깊어 병째

마셔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잠깐씩 몸을 싣고 내리는 버스처럼

짧은 설움일랑

잊고 간 분실물처럼 벤치에 남겨두고


헐벗은 나무의 부끄러움도 슬며시

가려주던 초록 잎처럼

빈 병만 남기고 간 이의 헛헛한 마음

지금쯤 채워졌기를


버스 정류장 벤치 아래

젖니처럼 삐져나온 초록빛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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