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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16. 2020

새로운 시작

10년에 한번씩 지어입는 맞춤 옷






        지난달 모두가 부러워하는 곳으로 이직에 성공했다. 이로써 5번째 회사다. 세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장장 여섯 번의 면접을 보고 모두의 환대와 함께 입사! 꿈에 그리던 구글은 아니지만 오히려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은 회사라 더욱 기대가 된다.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줌 미팅으로 온라인 신규 입사자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무려 세 시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웹캠과 발표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웃어야 했다. 웹캠 끄고 대충 들으려고 경력직다운 귀여운 꼼수를 부렸으나 인사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 다들 모닝커피랑 스낵 가지고 와서 편하게 들어. 하지만 웹캠은 끄지 말고 서로 얼굴 보면서 하자'. 어찌어찌 세션을 다 듣고 나니 눈과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새 회사에서 앞으로 진행할 비즈니스 플랜을 작성하고, 링크드인 프로필을 업데이트하다 보니 어느덧 한국에서 일한지 10년을 꽉꽉 채웠다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10년 동안 정말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그저 이유없이 좋은 사람, 이해하려 노력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꼰대, 나를 시기 질투하던 사람, 멍청해서 실수 남발하고 내게 뒤처리를 맡기던 선배, 뺀질거리던 여우 스타일 후배, 정말 닮고 싶은 멘토, 반면교사로 딱인 상사... 그 유명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온갖 종류의 또라이는 다 만나보고 뒤통수는 또 매번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사람 좋아하고 일단 믿음을 전제로 관계를 시작하는 나에겐 정말 많은 레슨을 준 10년이었다. 마케팅과 세일즈를 넘나드는 매번 새로운 업무와 다양한 국가 출신의 상사들 및 고객들과 일한 다이나믹한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어로는 10년을 'Decade'라고 표현한다. 뭔가 10년을 한 주기로 묶어놓은 느낌이다. 하긴 우리말도 10대, 20대, 30대 라 칭하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도 있는 것을 보면 뭔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원증 목에 걸고 신나게 산책로를 걷던 꼬꼬마 사원 시절부터 목, 허리 디스크에 어깨에는 덤으로 무거운 곰 세 마리 얹고 사는 부장 타이틀을 달기까지. 지난 10년의 한 장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이렇게 쓰고보니 뭔가 '라떼는 말이야~' 를 운운하는 젊은 꼰대 같지만 난 여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는게 정말 감개무량하다. 




       꼬꼬마 시절에는 해외파에 문과 출신 여자라 신입 때부터 왜 이 IT 회사를 왔냐는 걱정부터 '에이~ 써니는 일하다가 재미없으면 아빠 사업 도와준다고 해외 다시 나가면 되는 거 아냐?' 하는 조소 섞인 농담 들을 끊임없이 들었다. 나 자신도 매번 고비를 마주할 때마다 맞지도 않는 옷과 엄마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다 넘어진 어린아이처럼 역시 이건 내 길이 아닌가 보라며 엉엉 울었다. (일단 패션 스타일과 메이크업만 봐도 난 IT 회사에 맞지 않았다. 샤넬이나 에스티로더라면 모를까.)   


        첫 3년은 나이 비슷한 동기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버티고, 그다음 3년은 적성에 맞는 업무를 맡아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 마인드로 내가 사장인 것 마냥 죽어라고 성과 내는 재미로 다니고, 그다음 3년은 돈은 벌었지만 내 능력보다 큰 옷을 입고 기대치에 부응하고자 혼자 동동거리다가 심신이 피폐해졌다. 뒤통수를 맞고 한번 거꾸러졌고, 넘어진 곳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첫 쉼표를 찍었다. 




       방황하던 시기를 지나 운 좋게도 (물론 운은 실력, 타이밍, 사람 모든 게 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커리어를 잘 쌓아왔고, 한때 남들보다 빠른 승진과 높은 연봉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내가 제일 잘난 줄 알던 시기도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얘기했듯이 IT 업계는 나에게 안 맞는 옷이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배경과 성향에 맞지 않는 옷. 그래서 남들보다 고민도 배로 많았지만, 여기 고치고 저기 고치고 조금씩 손대서 포대자루 같던 옷을 이제는 나름 내게 맞는 맞춤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들이 뭐라 한들 내 몸에 잘 맞고 나 자신이 흡족한 내 스타일 말이다.  


        정답을 모르면 여기저기 물어봐서 둘러가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끌고 갔다. 한 장이 마무리된 이제야 어디 가서 '저 일 좀 해요.'라고 말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맞는 옷을 찾았으면 좋았겠지만,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지금의 옷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물론 결과가 좋아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 지도) 



     

   이번에 이직한 회사는 4년 전 에너지 넘치게 일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 앞으로의 10년 동안 이 옷에 어떤 새로운 장식물을 달아 가게 될지 기대된다. 다시 중고 신입 (?) 이 된 기분으로 쓰기 귀찮은 비즈니스 플랜을 마무리하러 간다. 다음 10년은 좀 더 스무스하게 지나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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