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Im Aug 15. 2024

호주가 나에게 준 선물

30년 넘게 묵은 내 컴플렉스들을 드디어 놓아주었다


"언니, 한국에서는 숨이 안 쉬어져. 모든 게 너무나 완벽하게 짜인 판이라 사회가 정한 규칙과 룰과 타임라인에 맞춰서 모든 게 딱딱 1초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 반면에 호주는 엉성하고 2% 부족한데 그 틈이 나를 숨 쉴 수 있게 해. 그게 호주의 매력 같아."


지난 주말 친한 언니와 만나 근황 공유를 했다. 그녀는 호주 생활이 어떻냐고 물었고, 나보고 한국이 갑갑하지 않냐고 물었다. 근래 만나는 사람들마다 같은 질문을 하고 또 나도 같은 대답을 하다 보니 무언가 글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고민 않고 그저 손가락이 가는 대로 편하게 적어본다. 편한 구어체에 반말은 양해해 주시길.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호주에 이사 간 뒤로 내가 극복한 나의 컴플렉스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




교포들은 그런 게 있어. 모든 곳에 속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 'We belong everywhere, but we belong no where.'


나만 해도 다개국어를 하니까, 미국인 그룹, 한국인 그룹, 중국인 그룹, 태국인 (혹은 동남아시아) 그룹... 회사 내에서나 밖에서나 모든 그룹에서 환영해 주고 행사가 있으면 꼭 초대를 해준단 말이야. 그런데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토종들과는 차이가 있어서 완벽하게 녹아들지는 못해. 모두에게 환영받는데 나만 괜히 겉도는 이방인 같은 기분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어.


그런데 그게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 나만 다르다고 느껴지면 그 격차가 더 크게 느껴지겠지? 내가 딱 그랬어. 난 분명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10여 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실컷 먹어온 눈칫밥 덕분에 나름 교포물이 많이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나만 다른 거야.


그런데 호주에 가니까 나만 또라이가 아니야. 모두가 다 (긍정적인 의미로) 또라이야. 개개인의 배경과 자라온 방식과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달라서 비교하려야 할 수가 없어. 내 나라 한국에서 난 혼자만 달라서 외로웠는데 여기선 모두가 다 다르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판단하지 않고 (judging)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


그제야 알았지. 아 나 한국에서 10년 동안 남들보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고 하고 싶은 말 하면서 '토종' 한국인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 그 틀 안에서 많이 애쓰면서 맞추고 살았던 거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래 내 모습을 많이 억누르고 살았구나.


호주에 와서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컴플렉스 두 가지가 사라졌어. 남들이 들으면 별게 아니라고 웃거나 아니면 왜 그게 컴플렉스냐고 생각도 못했다고 놀랄 수도 있는 두 가지. 


첫째는, 내 영어. 난 중고등학교를 태국에 있는 미국식 국제학교에서 나왔어. 그리고 중국으로 대학을 갔지. 실상 영어권 나라에서는 살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남들과 이야기할 때 나 동남아식 영어 한다고 자조적으로 농담하며 넘어갔지만, 사실 난 영어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어. 임원들이 세련된 버터 발음으로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걸 볼 때마다 어찌나 부럽던지. 


한국에서 교포라고 하면 일단 기대치가 있을 거잖아. 첫 직장에서부터 영어 관련된 이슈가 있으면 항상 모두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까. 아니 이봐, 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멍 때리고 있으면 안 들리는 건 똑같아. 스몰톡 하는 거 진 빠지고 피곤하고, 여러 명이서 그룹으로 오디오콜하면 컨텍스트 (context, 문맥) 따라가느라 똑같이 힘들다고.


그런데 모두가 나에게 잘할 거라는 기대치가 있다 보니 그게 나에겐 강박으로 다가왔었어. 그런데 호주 와서 그걸 어떻게 극복했냐고? 아이러니하게도 호주 와서 내 영어는 (내 기준) 퇴화했는데, 오히려 영어에 대한 강박과 부담감은 사라졌어.


호주에 오니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고 외국계 기업에서 업무 하면서 써왔던 미국식 영어와 너무 다른 거야. 사실 미국 국제학교에서는 호주 선생님을 절대 쓰지 않아. 커리큘럼 관련 문제도 있고, 급을 나누고 싶지 않지만 호주 영어를 낮춰보는 경향이 있어서 미국과 캐나다 선생님들만 있었어. 한국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호주 사람들이라도 억양이 강하지 않았고, 또 글로벌 팀과 일할 때는 본인들도 슬랭 많이 안 써서 크게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어. 


내가 외국어 학습 능력이 그래도 있다 보니 호주에서 만난 다양한 인종들에게서 하나하나 억양을 따오기 시작한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단어는 한국 발음, 어떤 건 호주 발음, 어떤 건 미국 발음... 거기에 한동안 영국인 친구와 붙어 다녔더니 이젠 미국식 굴리는 버터 알~~ 발음이 사라지고 영국식으로 발음하기까지.


보니까 내가 발음하기 쉬운 방향으로 멋대로 짬뽕해서 쓰고 있더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혀가 멋대로 움직여서. 


호주 가기 전까진 너 한국인이니? 아시아 어디 출신이니? 정도만 들어봤지.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어디 출신이니?라고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단 말이야. 근데 이젠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감을 못 잡겠다는 얼굴로 물어봐. 그러면서 혹시 싱가포르 살았냐는 거지. 


엥 갑자기 왠 싱가포르? 나 대만이나 중국인처럼 생기면 생겼지, 동남아 느낌은 없는데. 의아해서 왜 싱가포르이냐 물어보니 발음이 매우 'global' 하다는 거야. 그래서 어딘가 'melting pod'인 나라에서 온 것 같은데 아시안이니 싱가포르 아닐까... 뭐 나름의 추측을 해서 나온 게 싱가포르이었던 거야. 


그래서 '나 발음 그렇게 많이 이상하니? 사실 나 요즘 이걸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 이전엔 미국식 버터 발음 너무 예뻤는데, 오히려 영어권인 호주로  이사 가고 나서 엉망이 되어버렸지 뭐야. 이도저도 아닌 짬뽕이 되어 버렸어.'라고 징징댔어.


그런데 모두가 나에게 하는 말이,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건 절대 아니고 발음이 특이한데 그게 너와 너무 잘 어울리고 네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해 줘서 그래서 물어본 거라는 거지. 어떤 단어는 한국인 발음, 어떤 표현은 너무나도 미국식, 근데 또 어떤 단어는 영국인지 호주인지 모를 무언가. 그 모든 다른 요소들이 섞여서 좋은 의미로 특이하다는 거.


처음엔 그저 내가 스트레스라 하니 듣기 좋으라고 얘기해주나 보다...라고 자위했어.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매력 있다고 해주니까 아, 달라도 괜찮구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그러게... 완벽한 영어의 기준 자체가 어느 나라의 기준일까? 영국식? 미국식? 호주식? 모두가 본인 나라 고유의 악센트를 가지고 있는데 난 그저 그게 여러 개라 더 섞였을 뿐이잖아. 스트레스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네!라고 마인드를 바꿨지.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발음에 목매지 않아. 뭐 물론 글로벌 임원들이 세련된 미국식 영어로 발표할 때 보면 아직도 섹시(?) 해 보이는 건 사실인데 뭐 어쩌겠어. 이게 나인걸. 이제 와서 발음만 고치려면 고칠 수도 있겠지만 굳... 이...? 


둘째는, 몸매에 대한 강박이 사라졌어. 내 키가 175cm인데 무려 대학생 시절 55kg 빼짝 말랐을 때도 난 민소매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 윗 팔뚝이 컴플렉스거든. 남들 눈에는 이렇게 말하는 내가 어지간히 재수 없었을 것 같아. 키도 크고 말랐는데 뭔 멍멍이 소리를 하는 거니 라면서. 그런데 컴플렉스 라는 것 자체가 남들은 모르는 본인만의 그 무엇!인 거잖아. 나에겐 그게 팔뚝이었던 거고. 


어릴 때부터 모태 통통이었던 나는 한국에선 다이어트를 나의 건강이 아닌 말 그대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계속했고, 옷도 꼭 배를 가리고 팔을 가리고, 스타일을 제한하면서 입었어. 뭐 그래도 토종 한국인들 보다는 입고 싶은 대로 입었지만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룰 아닌 룰이 있었던 게지.


호주에 오니 모두가 너무나 다른 체형을 가지고 있는 거야. 키도 피부색도 타고난 골격과 체형, 그리고 각자 선호하는 패션 스타일도. 특히 남미 언니들이 아시안 기준으론 thick 하고 curvy 해서 어떤 이들은 그걸 뚱뚱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난 내가 가지지 못해서 그런가 그런 여성스러운 몸이 예쁘더라고. 


원래 남들한테 관심 없는 경주마 스타일이라 신경 안 쓰는데, 길거리 지나다닐 때마다 그저 풍경 중에 하나로 보이니까 알게 될 수밖에 없잖아. 모두가 배가 터질 듯이 꽉 조여서 흘러나와도 다들 크롭티 잘만 입고, 날이 더우면 노메이크업 맨 얼굴에 브라탑 하나 입고 엉밑살이 다 보이는 짧은 레깅스만 입고 조깅도 열심히 하고, 파티 갈 때는 세상 화려한 메이크업과 번쩍거리는 드레스를 입었어. 그녀들의 속눈썹은 조금만 팔랑거리면 그 힘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지.


첨엔 배 조금 나오는 크롭탑으로 시작해서, 그다음엔 나시에 아우터를 걸치고 다니다가, 이젠 해가 쨍쨍 날씨가 좋은 날이면 선크림 바르고 브라탑 하나 입고 나가. 그리고 레깅스 훌렁훌렁 접어 올리고 공원 한가운데 드러누워서 일광욕을 해. 


언젠가부터 뱃살이 조금 붙어도, 내 팔뚝살이 흔들려도, 개의치 않게 되었어. 내 몸에 대한 강박이 사라진 거야.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거지. 한국에 사는 친구들이 내 인스타 사진들을 보면서 그러더라. 한국에서도 내 스타일대로 잘 꾸미고 입었었는데, 호주 간 뒤로 훨씬 더 자유로워 보인다고. 그 속뜻을 알아서 그저 웃었어.


호주가 나에게 가져다준 제일 큰 선물이라 생각해. 내가 30년 넘게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너무나도 신경 쓰고 있었던 나의 컴플렉스 두 가지를 놓아줄 수 있게 해 준 것. 나를 있는 그대로 더 인정해 주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것. 항상 남들과 달랐고 다르게 살아왔고 그래서 이게 맞나? 매번 고민하느라 머리 싸매고 살았던 나에게 써니만의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것.


길어져서 오늘은 내가 극복한 (지극히 개인적인) 컴플렉스 두 가지에 대해서만 쓰고, 다음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호주의 장점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할게. 타이틀은 '호주 예찬론' 정도로 하면 되겠다.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호주 IT 취업기] 협상을 시작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