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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현 Feb 20. 2023

신념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일을 하는 겁니다

매일노동뉴스 기고

‘할 말도 많고 할 일도 많은’ 활동가로서의 첫 기고는 무슨 주제를 다뤄야 좋을까. 다른 이야기에 앞서 나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20대 초·중반의 열정을 노조활동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좋은 기억과 힘든 기억, 뿌듯한 기억과 화나는 기억이 뒤섞인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만뒀던 운동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노조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내가 속한 곳을 넘어서, 다른 경험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한 우물 안에만 있게 되면 깊이는 깊어질 수 있겠으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생각이 넓어지고, 유연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관악구노동복지센터 일을 시작했다. 노조 바깥의 노동운동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시도해 보고 있다. 동네 골목골목에서 일하는 시민들을 만나고, 작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 가는 일을 하고 있다. 일하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 속 문제를 포착하는 방법,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다각도로 지원하는 방법, 사각지대에 있는 소규모·신생 노조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소통하고 지원하는 방법, 센터가 위치한 자치구의 특성에 맞는 사업을 기획하는 방법, 나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어우러지는 방법, 지역사회와 노조와 지자체를 연결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숫자만으론 표현되지 않으며, 사람에겐 모순적인 모습들이 공존함을 매번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이런 일을 하는 나는, 활동가일까 노동자일까. 노조활동을 하며 “활동가는 편하면 안 된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조합원도 많은데, 활동가 최저임금 만원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한 시민단체의 중년급 활동가로부터 “활동가는 노동자가 아니다” “센터 직원은 활동가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으니 시민단체에 환원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과거에 들었던 말과 근래에 들었던 이야기는 표현만 바뀌었을 뿐 ‘열악함의 수준’을 증명함으로써 ‘신념의 수준’을 따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이야기다.



활동가에게 있어 신념은 중요하다. 신념이 있기에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노동복지가 없는 곳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더 신념 있는 활동가인가.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면 힘들게 살아야만 의미가 있는 건가. 활동가는 월급이 아니라 신념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활동도 활동 이외의 삶도 모두 소중한 나는 활동가가 아닌가. 이미 무수히 많은 활동가가 앞서 이야기했던 지속가능한 활동에 대한 고민을 굳이 다시 꺼내는 이유는 여전히 물음을 던져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하는 야근이라고 하지만 그 야근은 나만의 일이 아니다. 사무실의 누군가가 야근을 하면, 동료 활동가가 먼저 집에 홀가분하게 갈 수 있을까. 내 노동의 질 저하는 동료의 노동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대의를 위해 포기한 나의 월급 역시 동료의 월급에 영향을 끼친다. 슬프게도, 당신의 열정이 때론 주변인의 노동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적은 월급으로 열심히 야근하는 것이 미덕인 분위기는 이젠 그만할 때다.



그렇기에 사회 변화를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의 노조가 필요하다. 나의 노동조건과 동료 활동가의 노동조건을 바꿀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노조다. 올 6월 서울시 자치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서울시민간위탁노조(위원장 임득균)’를 설립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들이 모여 노동복지를 꿈꾸는 노조다. 노조를 통해 우리가 일하는 환경을 바꿀 수 있다. 민간위탁기관으로서 갖는 한계를 깨고, 지자체와의 교섭을 통해 불합리한 처우를 시정하고, 위탁 기간 제한으로 고용이 불안한 상황을 바꾸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서울시민간위탁노조·서울시민간위탁유니온·참여연대노조·혁신파크유니온·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인권재단 사람의 지속 가능한 활동 환경 조성, 아름다운재단의 공익활동가 지원사업 등이 활동가들에게 가지는 의미 역시 우리의 삶을 우리부터 존중한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관악구노동복지센터에서 제일 처음 맡았던 업무를 기억한다. 내가 앞으로 쓸 명함의 문구를 정하는 일이 나의 첫 업무였다. 명함에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조직팀장 이가현”이라고 문구를 넣었다. 처음의 그 다짐대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내 삶과 타인의 삶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서 노동하며 살아 가고자 한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여서 보람차고 행복하다. 우리의 운동판이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활동하자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노동조건이었으면 한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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