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은 날, 피아노 앞에서

by 소이

햇살이 거실 바닥에 부드럽게 번지고

열어둔 창문 틈으로

가을의 향기 묻은 바람이

커튼 끝을 스치며 들어온다.


그는 손끝이 기억하는 대로

쇼팽 발라드 4번의 첫 음을 눌러보았다.

그 울림 속에서

나는 오래된 이름을 떠올린다.


페달 위에 얹힌 발,

건반 위에 가볍게 놓인 공기,

조성진의 단정한 타건처럼

깨끗이 흘러내리는 순간들.


슈베르트의 마왕도,

리스트의 격정도

이 오후의 햇살과는 닿지 않았다.


오직, 쇼팽 겨울바람.

힘을 빼는 것이 힘이라는 걸

그의 손끝에서 배운다.


혁명은 아직 멀었지만,

왼손과 오른손이 맞지 않아도,

그 불완전함이 더 사랑스러운 것.


햇살은 환하고,

그림자는 천천히 자리를 옮긴다.

건반 위에 남은 멜로디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오듯


한두 음의 머뭇거림 속에서도

그는 웃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게 오늘의 연주.

그가 음악 속에 녹아드는

이 평온한 오후가 좋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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