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by 소이

여행이 가능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땅을 밟았다. 첫 공기는 차갑고 단단했다. 그곳 사람들은 대국 사람들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에르미타주는 놀라울 만큼 한산했다. 파리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줄을 길게 섰던 기억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피카소, 샤갈, 말레비치의 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피카소의 초기작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정교한 선과 섬세한 명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완성된 듯한 기교. 여기서 출발해 해체와 왜곡으로 나아가는 그의 궤적이 눈앞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샤갈의 푸른빛 속 연인들은 백야의 하늘과 겹쳐졌다. 붉은빛과 섞인 환상은 낯선 이조차 고향의 꿈으로 잠시 데려가는 듯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앞에서는 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 오래 바라볼수록 단순함 속의 거대한 울림이 밀려왔다. 흰 캔버스 위에 오히려 모든 것이 드러나는 듯했다.


마린스키 극장


저녁엔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백조의 호수를 보았다. 무대 위 백조들의 동작은 우아했다. 우리들은 동작의 의미까지 공부해 갔건만 여독에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지고 말았다. 예술과 졸음이 동시에 찾아온 순간조차 여행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여름 정원


낯선 땅에서의 친절도 기억난다. 그곳 사람들은 동양 여자인 우리를 아이처럼 챙겼다. 무뚝뚝하지도 거칠지도 않은 묘한 보호의 기운. 하지만 동양 남자들에게는 금세 배타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여름 정원. 친구들과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추위에도 런닝 하나 걸친 거구의 사내가 술병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우리들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괴물 같은 그림자가 사라진 뒤, 서로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방금 그게 뭐였지?”

공포와 해방, 긴장과 웃음이 뒤섞였던 순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내게 그렇게 남아 있다.

거대한 자부심과 따스한 손길,

예술과 사랑,

무서움과 웃음이 공존하는 땅.


흐린 백야의 공기 속에서, 나는 선명해졌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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