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본
심연의 바다 앞에 멈추어
아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빛조차 닿지 못하는,
스스로를 삼켜버린 어둠의 왕국.
숨소리조차 삼켜진 듯,
고요하지만 압도적인 정적이 사방을 감쌌다.
그 심연은 두려움이기도 했고,
또 다른 생명을 품은 자궁 같기도 했다.
끝없이 가라앉는 깊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 깨어날 듯 느껴졌다.
불현듯 인어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푸른 머리칼은 해류에 흩날리고,
물결에 스며든 노래는
파도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 순간, 바다 저편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무리.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소이야, 두려워하지 마.
검은 바다에 감도는 푸른빛은 플랑크톤이야.
그 빛은 범고래 무리가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어는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곧 거대한 숨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솟구쳤다.
검은 등과 흰 무늬,
범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물기둥을 내뿜었다.
그 울음은 깊고 낮게 퍼져
심해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고래는 잠시 멈추어
애잔한 눈빛을 남기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놀라 눈을 떴다.
벽에는 샤갈의 〈생일〉.
사랑이 공중에 흩날리는 그림.
그 속의 남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다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위를 손끝으로 스쳤다.
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림 속의 시간은 여전히 멈춘 채였다.
언젠가 나의 시간이
그림의 시간을 추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이
다시 시작되리라.
첫 웃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