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의 밤

quiet trigger.

by 소이

오늘도 선배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단호한 한 마디,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오늘 시간 되지? 만나자.”


잠시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방향을 대신했고 그 시선이 닿는 곳은 예측할 수 없었다.


차 안은 조용했다. 내비게이션도 음악도 꺼져 있었다. 창밖 풍경이 필름처럼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그와 함께라면 시간마저 부드러웠으니까.


저녁 무렵, 도착한 곳은 성수동.

성수의 저녁은 이미 힙했다. 길에는 연인들이 웃고, 음악은 느리게 흘렀다. 커피 향이 진하게 감돌았다.

그 모든 열기 속에서도, 그의 걸음만은 조용했다.


하필이면 예전에 한 번 왔던 ‘대림 창고 갤러리’. 하얀 외벽 위로 노을이 번지고 유리창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카페로 들어가 게이샤 싱글 두 잔을 주문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려 찾아보며 애썼을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어때, 향이?”


이미 마셔본 커피였지만 그 말을 삼켰다. 향보다 먼저 사라질 대답 같아서.


“괜찮네요.”


나는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말했다.


“같이 여행 갈래?”


그 말은 너무 가볍게 떨어졌는데 공기 속에서 오래 울렸다. 커피 향보다 느리게 그 제안이 스며들었다. 시간은 커피잔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


“일본 료칸이나, 아니면 대만 갈래?”


그는 열심히 찾아본 블로그와 맛집 사진을 보여줬다. 내가 모르는 그의 일상과 취향 그 안엔 어쩐지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설렘이 있었다.


나는 아련히 웃었다. 말투는 장난 같았지만,

그의 눈엔, 아이 같은 진심이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언제요?”

“한 달 뒤, 주말쯤?”


성수의 밤이 천천히 켜지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공기를 낯설게 만들었다.


동기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선배, 철옹성인데… 요즘 어떤 여자한테 완전히 빠졌대.’

‘다들 누구냐 묻는데, 끝까지 말을 안 한대.’


나는 눈을 피했다.


“해외는 좀 그래요, 선배.”


그는 커피잔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게이샤의 향이 가늘게 퍼졌다.


“왜?”

“그냥… 선배도 남자인데,

남자랑 단둘이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이 말 대신 나를 훑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그를 밀어냈다. 한 번 트리거가 당겨지면, 멈출 수 없을 듯한 그의 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시선을 내렸다.

잔 위로 노란 조명이 박자가 어긋나듯 흔들렸다.


“그렇구나.”


짧은 한마디.

웃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잔 안의 향만 남았다. 입술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렸다.

유리 표면에 닿는 미세한 소리가 묘하게 불안했다.


그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는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열린 문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스쳐간 자리엔 서늘한 채취가 남았다.


천천히 가라앉는, 게이샤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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