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연우에게 약혼 소식을 전한 뒤 더 이상 그의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다시 돌아볼 이유도 없었으니까.
선배는 하루 종일 예민해 보였다.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짧게 진동만 해도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평소엔 그런 걸 티도 안 내는 사람인데 내가 핸드폰 위에 손만 올려도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사람답지 않은 불안.
“괜찮아요? 선배.”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주 조금.
그날은 유난히 말도 적었다. 밖에 나가려는 기색도 없고 그냥 내 어깨를 조용히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지금이요?”
“응. 너한테… 얘기할 것도 있고.”
뭔가 결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백화점에 도착하자마자
선배는 망설임도 없이 보석 매장으로 들어갔다.
“예물… 아니면 그냥 선물.”
가격표도 안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당황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선배, 이렇게까지는 좀 그래요.”
그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소이.”
손을 잡은 그의 눈빛은 차분한데 안쪽에는 묘하게 조급한 마음이 숨어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또 그러셨어.”
그가 입술을 한 번 누르고 말을 이었다.
“옛날엔 똑똑한 여자는 씨… 뭐 그런 식으로
집안에 들였다고 하시더라.
요즘 세상이 그런 건 아니어도
결혼하면 아기부터 가져야 하지 않겠냐고.”
한순간 몸이 굳었다. 선배는 차갑지도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래된 상처가 건드려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솔직히 깜짝 놀랐어.”
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
그 말 듣고 오니까…
네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버리면 어쩌나
그 생각이 자꾸 머리에서 안 사라지더라.”
그가 조심스레 내 손등을 덮었다.
“소이, 난… 그런 집안 방식으로 살기 싫어.
어릴 때부터 그게 나한테도 상처였고.”
그가 잠시 멈췄다.
“너한테 만큼은 그런 아픔 남기고 싶지 않아.”
선배의 표정은 질투도, 화도, 집착도 아니었다.
그냥… 진짜로 ‘이대로 널 잃는 게 너무 두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지금은… 나만 봐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가 왜 예민했고 왜 그토록 불안해했는지 모든 게 단번에 이해됐다.
그날 나는 그 사람과 그의 집안 분위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