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어디에 있던 걸까…
다음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전날 선배가 내뱉은 ’씨……‘라는 말은
단순한 단어 이상이었다. 그 말은 약간의 모멸감을 줬고 분노보다 공허함을 남겼다. 화는 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아… 나는 이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보일 수도 있는 존재였구나.’
그 깨달음에 속을 비워냈다. 무거운 돌을 삼킨 듯한 답답함보다는 텅 빈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 딱 그것이었다. 커피를 내리다가 컵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굳이 그 말을 나한테 전해야 했을까…’
그건 아버지가 한 말이라며 전달한 이야기였지만
분명 그 순간 선배는 연우의 존재로 흔들렸고 자신의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그 단어는 선배 자신의 마음속 어둠을 잠깐 비친 거울 같은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어둠이 보여서.
테이블 위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배]
“어제 잘 잤어?
괜찮아?”
화면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스르르 화면 위로 미끄러지다가 멈췄다. 읽지 않았다.
그냥…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할 의지도 느낀 것을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말로 꺼내는 순간 더 깊게 상처가 드러날 것 같아서.
진동음이 다시 짧게 울렸다.
[선배]
“오늘 오전에 잠깐 볼 수 있을까?”
휴대폰을 뒤집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일까 봐…
이 순간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얇은 금이 간 유리처럼 빛은 남아 있는데 결은 틀어져 있었다.
조용히 거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오후 내내 조용히 집에 있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지만 바람 소리에 조차 예민해질 만큼
모든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냥 짧은 메시지를 선배에게 보냈다.
‘선배…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문자를 보내고 나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휴대폰을 멀리 밀어 두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아무 알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손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
몇 시간이 흘렀을까……
띠-띠-띠-띡.
도어록 버튼 눌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며 들려왔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문이 열렸다.
“소이.”
선배였다.
그는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얼굴, 손등에는 잔잔한 떨림이 있었다.
“오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너무 놀라서 저항도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품 안에서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이 내 목 쪽으로 파묻히며 짧게 떨리는 숨이 닿았다.
“미안…
하루 종일…
진짜 미칠 것 같았어.”
그의 손이 얼굴을 감싸고 이마에 낮게 입을 맞추었다. 마음을 확인하려는 듯한 키스였다. 내 마음이 아직 그에게 있는지 떠난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힘이 빠진 듯 바닥에 닿을 뻔한 몸을 선배가 그대로 안아 올렸다.
“잠깐만…..”
거실에서 방까지 그의 걸음은 무겁고 불안정했다.
방 안에 들어오자 그는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 옆에 무너지듯 앉았다.
둘 사이에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선배는 떨리는 손끝으로 내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제… 그 말 때문이었어?”
그가 낮게 물었다.
그 말에 참아왔던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내려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조용히 울기만 했다.
선배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내 뺨을 닦아주지는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 왜 울어.”
“… 연우 때문이야?”
순간 그 말이 방 안에 차갑게 울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마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멜 뿐이었다.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자 선배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저 조용히 울고 있을 뿐이었다. 선배는 조용한 눈물에 천천히 자기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밤은 길었다. 둘은 서로의 감정이 무너진 자리 위에서 말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선택이 옳았는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번져 들어올 때 방 안의 온도는 전날 밤과 전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어딘가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옆에 누워 있는 선배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졌다. 선배도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그의 표정에는 어떤 안도감도 없었다.
밤을 통해 가까워졌어야 할 두 사람 사이에는
오히려 낯선 거리감이 생겨 있었다.
“일어났어?”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선배는 내 손등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어깨가 아주 작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걸 알아챘다.
그는 급하게 말을 꺼냈다. 모든 걸 바로잡으려는 사람처럼.
“소이야…”
잠시 숨을 고르고 단단한 결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결혼식 날짜 잡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지도 못한 채 멈춰 섰다.
밤의 감정이 그의 ‘확신’이 된 것 같았다. 나에게는 밤의 감정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감정’이었다.
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 선배…”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선배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그걸 밀어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애정, 불안, 집착, 소유, 두려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이불 끝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의 감정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지만
그 감정이 사랑인지, 위안인지, 무너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선배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소이야.”
소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이야…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우리 둘 다.
순간 숨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느낌으로 알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써 숨을 고르는 듯한 제스처.
선배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도… 다 알고 계시자나.”
“그리고…”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 이제 너 놓아줄 생각 없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 말도 못 했다. 말을 꺼내면 쌓였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선배는 손등을 더 세게 감쌌다. 그 손이 따뜻했지만 그 온기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나도 이제 마냥 기다릴 나이는 아니잖아… 소이야.”
그는 조용하지만 단단히 말했다.
“이제… 서둘러야 돼.”
“결혼하고 신혼생활도 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도 낳고 살아야지.”
그 말은 결정된 계획을 ‘통보’하는 사람의 어투였다.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 선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뒤로 끊겼다.
선배는 내 떨림을 눈치채고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이야, 어젯밤… 우리 서로 마음 확인했잖아.”
확인.
결정.
돌아갈 수 없음.
그 단어들이 가슴 안에서 무겁게 내려앉았다.
선배가 출근하러 나갈 준비를 할 때 말없이 그의 옷깃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출근 잘하세요. 선배…”
선배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연락할게.”
그리고 문이 닫혔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그 소리에 마음 한편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흔들어놓으면 안 돼.‘
그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선배의 일,
선배의 위치.
그 모든 것 위에 나 자신이 불안정하게 서 있는 것 같은 기분.
…
간만에 본가를 찾아갔다.
엄마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채셨다.
“무슨 일 있지, 너.”
나는 결국 숨겨두었던 말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선배가 했던 말,
아버지의 표현,
결혼 이야기,
아기 이야기…
그리고 공허함.
엄마는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그 말은… 실수하신 거야.
어르신들 세대에는 그런 표현을 그냥 쓰기도 해.
나쁜 뜻이 아니라… 버릇처럼.”
말없이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말은 다정했지만,
가슴 한쪽이 공허한 건 그대로였다.
“결혼하면 아이 하나 낳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그 남자, 너 정말 좋아하잖아.
여자는 내 감정보다 앞서서 조금 끌려가는 기분일 수 있어. 원래… 남녀 관계가 그래. 남자가 적극적이고 여자는 좀… 마음을 받아주는 쪽이기도 하고.”
엄마의 말은 현실적이었고 세상의 기준에서는 맞는 말이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정리가 안 되고 무언가 놓친 것만 같은 두려움에 갇혀 있었다.
엄마는 내 얼굴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너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안정적으로 편하게 살면 좋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답답한지 왜 가슴이 눌리는지 엄마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스쳤는데 그 바람 속에서
어떤 따뜻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피어올랐다.
“왜… 지금 이 사람이 생각나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던 사람.
조급하지 않았던 사람.
내 마음의 속도를 기다려주던 사람.
나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던 사람.
처음으로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그 사람.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감정이 가볍게 흔들렸다.
슬펐다. 그가 건넸던 사랑이 내 삶에 허락된 단 한 번의 진심이었던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