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만 원을 허공에 뿌리는 모험
H와 나는 연애시절부터 (사내커플) 휴무와 휴가를 맞춰 여행을 다녔다.
차가 있는 H덕에 난 차를 구입하는 비용을 아꼈고, 여행 메이트가 생긴 내덕에 H는 곳곳을 다시 보게 되었단다.
우리는 이뽕이가 태어나기 전에
두 번의 일본, 세 번의 독일, 스웨덴, 체코, 헝가리, 스페인, 세번의 프랑스, 덴마크, 포르투갈, 뱃속의 이뽕이와 함께했던 네덜란드 그 외 등등 일 년에 두 번 이상 비행기를 탔었다. (H는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가봤다.)
H를 만나기 전의 나는 주로 혼자 여행을 다녀서 일 년에 세네 번 정도 긴 거리를 날아 낯선 곳에서 새해를 맞기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도, 생일을 맞기도 했다.
H 역시 나만큼이나 해외 경험이 많지만 철저히 관광지 도장찍기+인증샷 패키지여행이라 나와 함께 다니면서부터 풀밭에 드러누워 반나절을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하루 종일 있어보기도 하고,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책을 읽기도 했다.
처음에 돈 내고 이런 식의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며 이해불가 유일한 사람이라 했지만, 몇 번의 동반 여행을 통해 이런 식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고 존중해주었다.
나의 아기 이뽕이의 대중교통은 SRT, 제주도 비행기가 전부다.
그래도 제주도에 갈 때는 돌 무렵이어서 그런지 과자로 유혹이 되었는데 최근에 탔던 기차에서의 시간은 1시간이 10시간 비행보다 힘들었다.
아이를 낳고 H가 훅 '복직 전 유럽 어때?'라고 날리면, '싫어'라고 칼 대답을 했다.
세상 얌전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나의 아기는 개월 수를 차곡차곡 지낼수록 자아가 생겼고, 그 제곱 아니 세제곱쯤으로 고집과 떼 부림이 생긴 것 같다.
먹고 싸고 자고 숨쉬기만 하던 작은 생명체였을 때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자 했는데, 요즘은 다시 생명체 아니 뱃속 세포가 되면 좋겠다.... 하고 작은 말도 안 되는 바람을 하기도 했었다.
올해 봄. 벚꽃이 한창이던 날 우리는 경주로 갔었다.
봄에 경주를 가는 건 내가 20살 때부터 하는 연례행사 같은 의식이다. (평소 나는 연고 1도 없는 경주를 좋아한다) 이뽕이의 카시트 낮잠 시간으로 인해 강제로 보문단지의 벚꽃을 1시간 넘게 드라이브를 하니, 벚꽃이 예쁘게 쏟아지는 게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고 내년에는 안 와도 되겠다 할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 어지러움과 차멀미를 견뎌내면서 H에게 말했었다.
" 사람들이 다들 그러잖아.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할 때라고. 난 만약에 다시 이뽕이가 뱃속으로 들어간다면 에베레스트도 등반할 것 같아."
그랬던 내가, 요즘 들어 아기와 여행 반대를 외치던 나를 동의하는 내색을 비추던 H가, 그리고 나의 이뽕이가 유럽을 간다.
야금야금 연차를 소진하며 소소하게 때로는 호화스럽게 팔자에도 안 맞는 호캉스를 하고 있었다. 올해는 이렇게 보내자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유럽을 간다.
발단은 H의 추석 근무와 공휴일 연차 쓰기의 쓰리콤보가 딱 맞아떨어졌고, 몰아 쓰는 게 조금 눈치 보이지만 아기와 함께 여행이라는 아주 좋은 이유가 보태어 쿨 결재가 되었다.
사실은 시댁에 가서 평소 로망이었던 남도 여행을 해볼까도 했었고, 아기랑 있는 게 뭐가 힘드냐고 가끔 뉘앙스를 풍기는 H에게 독박 육아를 뒤집어 씌우고 싶기도 했었고, 호캉스 도장깨기로 못 가본 국내 호텔에 갈까도 했었다.
휴양지에서 호텔에서 느긋하게 누워 수영하고 밥 먹고 자는 게 실상은 아기와 함께 하면 휴양이 아니라는 건 이미 국내 호캉스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휴양지 특유의 느낌을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내가 용납이 안되었다.
이 긴 12일간의 (신혼여행보다 길구나!) 다시없을 H와 나의 직장인 라이프에서의 휴가는 지금이었다!
간간히 휴가 이야기가 진심 인척 말했지만 장난으로 생각했을 H의 유럽 가자 에 난 단칼에 무시했다.
이뽕이는 아빠에게는 효자다.
'안아줘 엄마', '이거 엄마', '아빠 아냐', '아빠 안녕'
하다못해 카시트 벨트를 매는 것도 굳이 엄마가 옆자리에 타서 매어주기를 원한다. 이런 상태에서 유럽을 가면 가만히 있어도 피곤한 비행기에서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는 예민한 나는 산송장이 될 테고, 산송장이 된 나의 보살핌을 받는 더 예민한 나의 이뽕이를 생각만 해도 가엾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에 대한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포스팅의 '엄마 아빠가 행복하면 아기도 행복할 거예요~'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12일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유가 욕심이 되고, 결국 욕망이 되어 유럽이 물망에 올랐다.
마음이라는 게 참 가볍고 간사스러웠다. 업무 중에 주고받는 ~ 물결표가 되게 성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행복할 거예요~'에서의 ~ 물결표는 되게 좀 많이 행복이 넘실거려 보였다. (지금 보니 힘듦, 고난, 고생이 보이네)
'8시간 내내 울어도 내가 안고 있을게. 드라마 볼래? 내가 받아놓을게 ^^. 가는 거지?'
'그래.'
나의 OK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이뽕이 여권 사진을 찍고 여권을 만들고, 항공권을 발권했다.
가만히 얌전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비즈니스를 끊고 갈까도 했지만 이코노미 3자리로 예약했다.
아직 24개월이 안돼서 앉고 갈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그건 나나 H나 생각조차 안 했다.
내일 발권하자 하고 나서 하루 만에 30만 원이나 올랐고, 더 오를까 봐 빨리 하자 했는데 3일 뒤에 40만 원이 떨어졌.... 다. (액땜이라 생각하자^.^)
아기가 있어서 호텔보다는 취사가 자유로운 집을 렌탈 하려는데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예약을 하려니 좋은 곳은 다 예약불가였다. 그나마 괜찮은 곳으로 했는데, 워낙 관광사업으로 먹고사는 곳이라 그런지 조금 더 빨리 했으면 이 돈으로 퍼스트 타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 다. (액땜이라 생각하자 ^^^^)
우리는 여행을 할 때 주로 내가 어디 어디 가고 싶다 하면 별표를 해두고, 로컬 맛집이나 현지 편의시설은 H가 찾아서 최종 루트를 짜는 식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진다.
근데 요즘 떼가 지구 대기권을 뚫고 나갈듯한 이뽕이 덕분에 휴대폰을 볼 시간이 없다.
H는 갑자기 12월 시가 식구들과의 하와이 여행이 잡혀서 그것부터 끝낸다며 (아무렴 어른 공경 인정해줬다.) 정신 팔려 있고, 2주 남짓 남은 이 시점에 계획이 없다시피 하다.
도시 간 이동 정도만 체크하고 유연하게 일정을 즐기는 나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은 아기랑 함께 하는 여행이니 제대로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2안, 3안 까지는 해놔야 마음에 놓이는데 그게 안되고 있으니 발만 동동 디데이는 둥둥. 어떻게든 되겠지.
아. 목적지는 이탈리아다.
어제저녁 치킨을 야무지게 발골하고 있는 H에게
'바티칸 가지 말자. 가이드 투어 자체도 사람들 치여서 힘든데, 아기까지 있으면 더 힘들 것 같아.'
'우리끼리라도 가면 되잖아.'
'난 너한테 잘 설명해줄 자신 없고, 가기 전에 다큐멘터리 보면서 답사할 시간도 없어. 그리고 이뽕이 미술관 안 좋아하잖아. 아기 힘들게 가지 말자 그냥.'
'그래도 로마까지 가서 바티칸을 안 가다니...'
'너 예전에 가서 들었다며, 나중에 가서 또 들어. 이뽕이는 친구들이랑 커서 가라고 하자.'
이탈리아는 너무 관광지라서 사실 평소에 가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보는 옛 유적지는 안 보느니만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
단지 보고 가봤던 여행이 목적이 아닌 적어도 4일 이상 지내고 직접 경험하는 여행을 하는 나한테도 듣기만 해도 피곤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어딜 가도 관광객들이 있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현지인들이 있는 곳에는 잘 가지 않았던지라 사실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탈리아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나마 따뜻한 곳'
스페인을 고려했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미 스페인에 많이 가기로 했는지 전부 풀북킹 이었으니 패스.
포르투에서 원정경기를 봤던 유벤투스 팬인 H에게 선물이라며 쿨하게 경기 알아보라고 했는데, 항공권 발권하고 나니 딱 그 기간에 경기가 없단다. (몰랐어, 미안)
누군가가 이탈리아를 아기랑 가는 우리에게 천만 원을 허공에 뿌리는 경험을 할 거라고 했다.
애 데리고 힘들게 뭐 하는 거냐고 생각만 해도 고생이라고 했다.
사실 나의 심경변화를 결정하게 해 준 '부모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하다.'라는 문장은 핑계가 된 지 오래다.
가기 전부터 서로 계획을 안 세운다며 메신저로 투닥거리고 (얼굴 볼 시간도 없다.) 아기 짐을 싸다가도 이 많은 걸 가져갈 생각에 암울하고 잠깐의 외출에도 떼를 부리고 바닥에 주저앉는 이뽕이를 '내 자식' 아님 하며 부정하고 싶다.
기저귀가 싫은지 계속 셀프 배변훈련을 실천 중인 아기와 유럽 화장실을 들쳐 안고 다닐 생각 하면 걱정 하나.
낯선 해외에서 서로 으쌰 으쌰 해도 모자랄 판에 배려 따위 싹 다 잊고 대판 싸울지도 모르는 '애아빠' 걱정 하나.
엄마밖에 모르는 나의 예민 아기 밥걱정, 잠 걱정 (사실 이게 가장 걱정), 혹시나 낯설어서 아프면 어쩌나 걱정 하나.
다른 거 제쳐두고 이탈리아 방문할 도시 외국인 혹은 소아 전문 병원 검색부터 해놓은 나는 엄마가 되어 첫 해외여행을 간다.
아빠랑 놀다가
' 이뽕이 비행기 탈 거예요? '라고 물으면,
' 네에!!' 하고 세상 크게 대답하는 나의 아기.
아직 시작인데, 벌써부터 길어진 문장들이 알려주듯 심정이 복잡하고 마음 정리가 시급하다.
이번 여행에는 H의 생일. 그리고 우리의 3주년 결혼기념일이 있다.
가벼운 가방과 세련되게 나름 멋 낸 옷차림 대신 유모차와 (어쩌면 내일 버릴지도 모를) 옷차림 가족여행이겠지만, 22개월 아기와 천만 원을 허공에 버리더라도 그만큼의 교훈이 있겠지.
매일 자기 전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되뇐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조금 더 욕심내어 행복하게 즐겁게 잘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