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 나는 엄마엄마엄마
'마마걸이야'
종종 엄마를 따라가는 수영장 샤워실에서 준비를 하는데, 불쑥 들린 소리.
엄마와 같이 수영 강습을 듣는 아주머니로부터 오랜만에 저 단어를 듣게 되니 머리가 번쩍였다.
그 뒤에 다시
'부러워. 딸이랑 가까이 살아서 수영도 같이 하고, 난 멀리 살아서 그런 것도 못해.'
라는 말이 따라왔지만, 33살이 되어 듣게 된 마마걸은 약간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고 서둘러 수영복을 입게 했다.
대학생 3년 내내 기숙사 혹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다 마지막 1년 난 결국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었는지, (졸업 이수 학점을 다 들어서인지) 학교 수업이 여유로웠던건지 연애를 하지 않아서인지 무튼 다시 통학을 했다.
생각해보면 그 전에도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끝나자마자 휑한 마음을 유흥에 홀리지 않고 곧장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결혼을 할 즈음 신혼집에 대해 고민할 때에도 무조건 '엄마랑 같은 아파트'였다.
결혼 전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곳이 회사 출퇴근으로도 좋았고, 나중에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기에도 '할머니 육아'가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웃돈을 주고 굳이 지금의 이곳에 살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난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무엇'때문인지는 정확히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 뇌가 정확하게 딱 그 이유를 지워버린 것 같다. 어쨌든, 그때 매일매일 책을 세워놓고 학교에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울지 말라고 하는 친구의 말에 더 주체 못 해 눈물이 교복 치마가 흥건해질 정도로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엄마에게 툭 말을 꺼냈다.
'엄마 나 학교 그만 다니고 싶어.'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네가 지금보다 행복해질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학교에 가기가 싫어.'
'그래. 그러면 학교를 그만두고 너의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 그 삶에서 네가 행복하다면 그만두자.'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 쿨한 엄마였다.
왜 학교가 가기 싫으니, 누가 괴롭히니, 공부가 힘드니 라고 꼬치꼬치 묻지도 않고, 학교에 찾아오지도 않고, 사춘기 때 하는 그 흔한 반항이라고 단정 짓지 않고 내 생각을 존중하고 내 삶에 대해 정중하게 물었다.
(물론 내가 공부도 엄마가 걱정할 수준이 아니었고, 교우관계로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고, 연애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한 달 동안 매일 저녁 엄마와 마주 앉아 내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려보았다.
중2. 책으로 배운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했고, 부모님과 늘 함께하는 안락함을 살아온 나에게 자퇴로부터 시작되는 크고 묵직한 문제들과 또 다른 고민들은 그때의 매일을 울게 만드는 이유보다 거대했다.
그때의 엄마와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삶이 있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때쯤 엄마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셨다.
나의 쪼꼬미가 꼬물이였을 때부터 '함무니'를 말하는 20개월이 된 지금.
아빠보다 더 많이 보고, 엄마보다 더 많이 업어주고, 할아버지보다 더 많이 얼굴을 마주하는 '함무니'로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문화센터를 가거나, 조금 멀리 여행을 가고 싶거나, 근교로 나들이를 해야 할 때 늘 함께 간다.
20개월의 기운 넘치고 에너지 넘치는 아들과 난 아직 그 흔한 백화점 혼자 가본 적이 없다.
오전 수영강습이 끝나고 따로 약속이 없으면 엄마는 늘 함께 가준다. 그래서 편하고 그래서 난 육아가 조금 덜 외롭다.
내가 아프거나 쉬고 싶을 때, 엄마는 아기의 손을 잡고 나간다.
아기가 칭얼거리거나 기운이 없을 때, 엄마는 아기를 업고 세상 구경을 해준다.
더워서 외출을 못하거나 흥밋거리가 없을 때, 엄마는 아기를 위해 우리 집 물놀이장을 개장한다.
아기 사진을 찍을 때면 언제나 엄마가 옆에 있었다.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엄마, 나 동영상 찍고 있잖아.'
예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프레임에 엄마의 손이 보이면
'엄마, 나와봐.'
그렇게 생각 없이 나의 '아기'에 대한 기억을 쌓아가며 지내고 있었다.
- 나의 아기. 그리고 언제나 '우리 엄마'
생일이나 긴 여행을 떠날 때,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곤 했다.
그때마다 늘 '엄마의 삶을 살아. 언제나 응원할게.'
라고 입바른 허울 좋은 소리를 해댄 것 같다.
음식에 넣어야 하는 게 고추장인지 고춧가루 인지도 몰라 전화를 하고, 남편과의 다툼을 친구에게 말하듯 마냥 쏟아내고, 아기와의 시간이 지루해질 때쯤 엄마를 누구보다 반긴 건 나였다.
33살인 지금 난 '외동딸로 자랐지만 외롭지 않았어요.'의 말 뒤에 숨어있는 무수히 많은 '엄마의 흔적'을 아직도 매일매일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아주머니가 제대로 보신 거다. 마마걸이다.
난 어릴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이 부모님의 부재였다.
저녁이 되어도 아빠의 소식이 들리지 않을 때, 여행을 간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불안에 휩싸여 연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세상에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 난 의외로 꽤 혼자 잘 지낸다.) 부모님이 세상에 없다는 상실감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늘 생각한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나의 아기가 태어나고 생물학적으로 꽤 어려운 확률이 되었지만, 그래도 저 생각은 확고하다.
입 밖으로 엄마한테 가끔 툭 던지면, 엄마는 '헛소리'라고 단정 짓는다.
요즘 아기의 사진을 보면 늘 한 배경 두 사진으로 남긴다.
'아기', 그리고 '아기와 우리 엄마'.
사진을 볼 때마다 귀여운 아기의 표정과 늘 새로운 행동과 움직임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가장 잘 한일 같다. 한 인류의 자라남을 그 삶을 통째로 지켜보고 가르쳐주고 함께 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그리고 함께 남기는 우리 엄마의 기록.
예전에는 엄마와 아기가 함께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볼 때 나중에 혹여 내 바람대로 (내가 가장 먼저 죽는) 되지 않는다면, 마마걸인 내가 아이의 추억을 볼 때마다 엄마의 흔적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보면 꽤나 큰 청승이고, 부모와 분리되지 못한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성인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쿨하게 인정.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던 엄마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쟤네들 저기서 노래 부르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좀 늦게 시집갔으면 엄마랑 여행 다니고 그랬을 텐데, 왜 이렇게 빨리 갔어'
'엄마, 시집간다고 했을 때 두말없이 오케이 했었잖아.'
'그랬나? ㅎㅎㅎ 우리 귀여운 예쁜 손주 이뽕이가 있으니 엄마는 좋아요~'
'뭐야 그게...-_-'
결혼 전 바쁜 와중에 티켓팅을 해서 무작정 엄마와 함께 갔던 헝가리+체코 여행이 엄마는 늘 기억에 남는지 간혹 말한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비행기 시간이 엉망이었고, 좌석도 최악이었고, 나를 찍은 사진 결과가 별로여서 투정 부리는 철딱서니없는 나였던 (지금이라고 별 다르지 않아서 더 문제인) 그래서 미안한 엄마의 처음 유럽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나마 내가 고려한 부다페스트 최고의 야경이 창밖 가득인 5성급 호텔에서 피곤했는지 쿨쿨 잠만 잤던 엄마였던 거 같은데, 나와 따로 떨어져 혼자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과 유쾌하게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자고 있는 나를 뒤로 하고 아침 그 강변을 걸었던 작은 순간들이 아직도 엄마한테는 큰 기억인 것 같다.
아직 나의 아기는 엄마 없으면 밤새 목놓아 울어서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고, 그래서 엄마가 여행 이야기를 할 때면 아쉬워 마음 한편이 무겁다.
나의 아기가 조금 더 자라면 나의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야겠다.
엄마가 늘 응원해준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제 곧 엄마의 생일이다. 추석 전날 음식을 만들다 혼자 가서 아이를 낳고 오셨다는 외할머니 덕분에 우리 엄마는 지금까지도 연휴 혹은 명절에 가볍게 생일을 지나치다시피 한다.
그날의 사진은 어제 처음 '함무니' 소리를 한 엄마의 예쁜 손자랑 엄마가 '호-'하며 예쁘게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