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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요리란

by 요중남

“행복하신가요?”


한국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죠.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는데 세계 행복지수 조사 결과는 충격적 이게도 OECD 38개국 중 최하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33위에 머물러있습니다. 여러 가지 지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수치일 텐데요. 멀리 가지 않더라도 코로나 이후 세계문화 강국이라 불릴만한 한국에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행복지수가 낮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20대 초반 IMF라는 경제상황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입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계속되는 기업의 부도 이야기, 개인의 파산,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얘기로 도배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대학교 초년 생이였는데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멀리서 공부하러 온 친구들이 용돈도 받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좀 여유가 되는 친구들에게 더부살이하던 경우도 있었죠.


우리의 불행감은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까지는 열심히 일하면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고 내 집 한 채는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갔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저희 집도 희망을 갖고 시작한 작은 우동가게가 있었는데 오픈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IMF 직격탄을 맞게 되었죠.




“행복과 불행 사이에 행동했던 것.”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픈빨이라고 하죠. 개업과 동시에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이 몇 개월을 보냈거든요. 이러다 금방 부자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하루 매출 100만 원 가까이 찍었으니까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한 누님이 도와도 힘들었을 당시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3개월 뒤에 국가부도 상황이 도래되었고, 직장인들은 허리띠를 졸라 매기 시작했습니다. 오픈 빨로 유지되던 하루 매출이 반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1/3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점심시간만 잠깐 반짝하고 나머지 시간은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했죠.


그렇기 때문에 더 악착같았을까요. 어머니는 폐업할 때까지 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가게를 열고 밤 10시에 셔터문을 닫으셨습니다. 학교 수업이 없을 때면 저도 하루 종일 도왔고, 하루 마감을 할 때면 항상 어머니를 도와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아직 어려서였는지 저는 심각성을 잘 알지 못했고 한숨만 늘어나는 어머니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휴학을 했고 가게를 도와 인건비를 줄였습니다. 그리고 주방이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쉬었기에 어머니하고 둘이서 가게 일을 했습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시고 저는 서빙과 계산 배달등을 했었죠. 되도록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피곤해하던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주방을 들어갔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관심도 많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취사병으로 근무했고요.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던 때는 군대 시절이었습니다. 500명 분의 밥과 반찬 국, 튀김등을 만들었습니다. 매끼 두 포대의 쌀과 양파 한 박스 이상씩을 썼습니다. 냉동 생선은 2박스 이상씩 손질하고 요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신감에 ‘까짓것 어려워 봤자 얼마나 어렵겠어.’라는 생각으로 주방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런데 제 판단 미스였습니다. 항상 대량으로 조리하던 습관이 소량 개인에게 맞춰야 하는 시스템에 적응하기까지 엄청 오래 걸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양념도 듬뿍듬뿍 사용했던 저였기에 숟가락으로 조절하기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익숙해져야 어머니가 편해진다는 생각에 점심시간이 지난 후 계속 양 조절을 하며 연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주방일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고, 비슷한 맛을 내며 손님 상에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주방이모님이 나오지 않는 날에도 어머니는 걱정하지 않으시게 되었고요.




“나에게 요리란.”


그때가 제대로 요리를 해본 첫 경험이었습니다. 특히나 대량으로 하던 단체급식이 아닌 한 명 한 명을 위한 식사를 제공한 것은 처음이었죠. 누군가가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맛있어하며,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경험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이런 게 요리를 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요리책을 살펴가며 따라서 만들어 보고 만든 음식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조카들과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무렵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를 했었는데 그 사람을 위해서 갖가지 요리를 하고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던 기억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저에게 요리란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정성을 깃들일 수 있으니까요. 사랑이 너무 거창하다고요?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지 않으면 형편없는 음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가족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식단을 제공할 수는 없겠죠.


재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사람이 이것을 먹었을 때 어떤 점이 건강에 이득이 될지 그리고 그 한 끼 식사로 또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간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나 중년이 되어 보니 다시 한번 느낍니다.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 삶은 나와 내 가족 모두에게 큰 짐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버릴 수는 없겠지만 아프기 전에 건강하게 먹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애인활동 지원사로 몸이 불편한 분을 케어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잘 먹고, 잘 움직이고, 잘 지내는 것입니다. 저는 그중에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양이 고르게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에너지를 얻고 질병에 노출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공부하게 된 것이 식품영양학과였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어머니가 편식을 하게 되었는데, 또 나름대로 맞춰서 요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생겨버렸죠. 괜찮습니다. 그 또한 저의 사랑의 방식이고 조금의 수고만 얹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요리를 하시나요? 거창하게 요리라 표현했지만 따듯한 라면 한 그릇에 계란 한알을 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내어 주는 것 만으로 사랑 가득한 한 끼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내일 하루도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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