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인간의 삶과 생존에 있어서 여러 모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기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기억이 지속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단기 기억은 작업 기억이라고도 하며, 수 초에서 수 분 동안 지속되는 기억이고, 용량은 제한적이다. 한 번에 7개 정도를 외울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의 더 정교한 연구는 4개 정도라고 주장한다. 작업 기억은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고 처리하는 뇌 시스템이다. 전화번호를 외워서 전화를 거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반면에 장기 기억은 수 분에서 몇 년 동안 지속되는 기억이다. H.M.의 경우에는 작업 기억은 정상이었지만, 장기 기억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작업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는 전두엽의 배외측 전전두엽에 위치해서 전혀 영향을 안 받았지만,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는 측두엽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집중을 통한 단기 기억 저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주의 집중을 담당하는 배외측 전전두엽이 단기 기억 역할도 겸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배외측 전전두엽은 장기 기억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이다.
의식적 자각의 필요 여부에 따라서도 기억을 분류할 수 있다. 의식적 자각을 필요하면 서술 기억 또는 외현 기억이라 하고 의식적 자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비서술 기억 또는 내현 기억, 암묵 기억이라 한다. 어제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혹은 한 달 전 관람했던 영화 제목을 잊지 않은 것은 서술 기억 덕분이고, 자전거를 타는 거나, 번개 칠 때마다 유난히 무서워하는 것은 비서술 기억 때문이다. 서술 기억은 해마에 저장되기 때문에 H.M.은 어린 시절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 알츠하이머나 만성 알코올 의존증의 경우도 발병 초기에 양쪽 측두엽 부위를 침범하기 때문에 기억력 감퇴가 초기 증상으로 나타난다.
비서술 기억은 무의식적이며 유형이 다양하다. 서술 기억처럼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얻지만, 의식적 회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무의식적 행동으로 저절로 표출된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나 예전에 배운 골프 스윙 동작이 몸에 배어 잊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비서술 기억 중에서 몸으로 기억하는 기억을 절차 기억이라고 한다. 비서술 기억은 서술 기억과는 달리 신피질, 소뇌, 선조체, 편도, 뇌줄기 등의 다양한 뇌 구역에 저장된다. 대뇌는 자전거 타기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사고 패턴이나 행동 패턴을 무의식의 영역에 보내버리고, 좀 더 예측이 필요하고 집중해야 할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비서술 기억은 감정적 상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를 정서 기억이라고 한다. 이때 편도체가 기억 시스템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 느낌을 비서술 기억 형태로 저장하고, 후에 비슷한 장소나 상황에 처하면 처음에 느꼈던 비슷한 감정적 반응을 보인다. 문제는 이를 의식적으로 회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공포 반응이 좋은 예이다. 이것은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비서술 기억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예전에 천둥소리가 나는 밤에 창 밖에서 검은 물체가 다가오는 것을 봤다면, 이후에도 천둥소리가 나면 공포를 느끼게 된다. 평범한 소리나 냄새도 어떻게 경험하고 느꼈느냐에 따라 비서술 기억으로 저장되어 알 수 없는 공포감이나 행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기의 비서술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될 수 있다. 2018년 조셀린과 프랭클린 교수는 아기 쥐들에게 약한 전기충격으로 공포 기억을 만들고 이때 활성화된 신경세포들을 표시해 두었다. 이후 아기 쥐들이 성장하면서 공포 기억이 사라졌지만, 표시한 신경세포들을 인위적으로 활성화시키면 다시 공포 반응을 보였다. 아기 때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는 없어도 그 흔적은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실험 결과는 어린 시기의 경험과 주변 환경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권위적인 태도를 지니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수동적이거나 복종적인 태도를 지닌다.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 비서술 기억으로 무의식에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를 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다.
기억은 부작용도 있지만, 인간의 삶과 생존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비서술 기억의 한 형태인 습관화도 그러한 예이다. 습관화는 처음에는 특정 자극에 깜짝 놀라 반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극에 둔감해지게 만든다. 이는 생존에 중요하지 않거나 해롭지 않은 자극들을 무시하고 더 중요한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위함이다.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면 처음에는 긴장하겠지만,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울려도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사이렌 소리에 둔감해지는 경우가 그렇다. 성적 반응도 습관화에 의해 감소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