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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범 Jan 06. 2019

17 나란 정체성의 핵심, 기억. 세 번째 이야기

누구나 떠올리기 싫은 암울한 기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은 삶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완벽하지는 않다. 기억의 정확성과 관련된 유명한 실험이 있다.


1986년 미국에서는 끔찍한 챌린저호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 다음날 나이서와 하시는 심리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고 뉴스를 들었을 당시의 상황을 7문항으로 된 설문지로 자세히 조사했다. 그리고 2년 반이 지난 후에 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설문지로 다시 한번 조사했다. 이때 설문지 답변의 정확성을 5점 만점으로 나타내도록 했다.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정확성에 대한 자신감은 평균 4.17이었지만, 그들의 25 퍼센트만이 전에 설문지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또한 처음의 설문지와 비교해 7문항 모두 답변이 다른 학생은 25퍼센트였고, 단지 10퍼센트만 전과 비슷한 기억을 했다. 더 당황스러운 사실은 처음과 다른 대답을 한 학생들이 최초 설문지를 보고도 지금의 기억이 맞다고 집요하게 우겼다는 점이다. 9.11 테러 사건 당시에도 비슷한 실험이 행해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억의 오류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파괴된 사건도 있었다. 1986년 미국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영리하게도 범인의 인상착의를 머릿속에 담았다. 나중에 범인을 잡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인상착의가 비슷한 한 남자를 체포했고, 그녀는 법정에서 그 남자가 확실하다고 증언하였다. 이 용의자는 결국 수감되었고,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에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틀렸다는 증거가 있어도 기억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감정적으로 강한 인상이나 큰 충격을 받은 사건에 대한 기억들이 더 그렇다. 이러한 기억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섬광 기억’이라 한다. 섬광 기억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챌린저호 폭발 사고나 9.11 테러 사건 당시의 기억처럼 말이다.


기억력 저하를 촉발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신에서 아드레날린과 코티졸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아드레날린은 심장박동이나 혈압을 상승시키고, 각성 상태를 고조시켜서 기억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코티졸은 혈당을 높이거나 대사 작용을 도와 신체가 스트레스 상황하에서 비상사태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적당한 양의 코티졸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고 해마를 자극하여 기억력을 증진시킨다. 이는 타당해 보인다. 위험 순간을 기억해 둬야 나중에 비슷한 순간이 다시 오면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도하고 지속되는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지속되어 과도한 양의 코티졸이 분비되면,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해마 세포를 파괴한다. 세포 간 연결을 부식시키고, 해마를 위축시켜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실제로 배양접시에 신경세포를 넣고 코티졸을 부으면, 신경 세포가 쪼그라든 모습을 볼 수 있다. 더그 브렘너는 많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이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식료품 가게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등을 기억해내는 데 어려워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도 스트레스와 기억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수면 부족은 해마의 세포 성장을 억제해서 기억력을 저하시킨다. 수면 부족도 문제지만, 너무 많은 잠도 뇌기능을 감소시킨다. 미국 국립 신경질환 및 뇌졸중 연구소는 뇌 건강을 위해서 성인의 경우는 7~8시간, 초등학생의 경우 10시간 정도의 수면을 권장한다. 수면 동안 뇌는 기억을 공고히 하는 방법보다는 망각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으로 기억을 강화시킨다.


운동도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훌륭한 방법이다. 운동과 관련된 많은 연구가 있다. 그중 하나는 신경학자 스콧 스몰의 연구이다. 그는 한 집단을 3개월 동안 운동을 시킨 이후 그들의 뇌를 영상 촬영했다. 놀랍게도 운동과 관련된 뇌 부위의 변화보다는 해마 모세혈관의 부피가 30퍼센트 증가한 사실을 발견했다.

                                                                                      

희한하게도 우리의 뇌는 현실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억도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인간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불행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나’란 자신을 쓰라린 추억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망각이나 현실 왜곡이 필요한 것 같다. 실제로 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부정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긍정적 사건에 대한 기억보다 빨리 지우려고 한다. 뇌는 우리에게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기 만을 바라는 염치없는 이기주의자이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실생활에 이용할 방법이 있을까?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재편집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이러한 방법이 심리 치료에 쓰이기도 한다. 누구나 떠올리기 싫은 암울한 기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수업시간에 대답을 못해서 쩔쩔맸던 기억이 있는가? 누군가가 부당하게 비난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기억이 있는가? 그 순간이 생각날 때마다 심장이 꿍꽝거리면서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이런 기억을 재편집해서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하면 심장의 요동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보너스로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비슷한 상황에 대비해 멋지게 대처하는 연습까지 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수업 시간에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쩔쩔맸던 기억이 있다면, 멋지게 대답하는 모습으로 바꿔 넣는다. 부당하게 비난받았는데 아무 말 못 했던 기억이 있다면,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맞받아치는 모습으로 바꿔준다. 새롭게 만든 기억을 통해 창피했던 모습을 멋진 모습으로, 화났던 모습을 통쾌한 모습으로 바꾼다면, 그때의 감정도 상당히 희석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종종 왜곡해서 기억하곤 한다. 그러면 스스로를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본인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 이러한 왜곡 기억은 자기 보호 본능 측면에서 보면 너그럽게 봐줄 만하다.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픈 기억을 때로는 지워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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