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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Apr 22. 2021

냉장고 안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냉장고 안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냉장고 청소를 하며 이 당연한 사실을 곱씹었다. 간만에 제대로 들여다본 냉장고 안에는 이미 지나가버린 수많은 시간들이 칸칸이 숨겨져 있었다. 길게는 1년 전에 이미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것부터 짧게는 일주일 전에 끝난 것까지. 음식물과 포장지를 분리하다 뜯지도 않은 닭가슴살 팩에 손이 닿았다. 아차 싶었다. 분명 일주일 전쯤, 얼마 남지 않은 유통기한을 확인했던 일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유통기한을 보며 ‘뭐 아직 좀 남았네. 나중에 꺼내 먹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냉장고 문을 닫은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잊고 있었다는 사실도. 유통기한이 남았다는 안도는 곧바로 방치로 이어졌고, 방치의 대가는 무거웠다. 순식간에 가득 찬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나가자 죄책감의 무게만큼이나 양손이 무거웠다.


 탕탕, 분리수거장 옆 음식물 전용 쓰레기통에 죄책감들을 쏟아내며 건너편 덩그러니 놓인 의자로 시선이 향했다. 등받이에 스티커가 붙여진 걸로 봐선 버리고 간 것이 분명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더러워진 다른 폐가구들 사이, 오랜 기간 아껴서 쓴 듯 유독 깨끗한 의자를 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어떠한 사정으로 잠시 두고 간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봤던 드라마 속 조연 캐릭터가 실존한다면 분명 이 의자에도 앉아볼 듯했다. 길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인 인물이었다. 드라마 후반에 우연히 자신이 어렸을 적 사용하고 버렸던 의자와 다시 조우한다. 그 장면을 보며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거라면 그건 영영 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두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길가에 홀로 서 있는 의자를 보면 “두고 갔다”는 표현이 먼저 떠오른다. 이 날도 그랬다. 누군가가 “두고 간” 의자와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사이에서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보이는 숫자로 기한이 붙는다면? 닭가슴살 팩 14일, 계란 한 판 30일, 파인애플 통조림 24개월처럼 좋아하는 감정 6개월, 미워하는 마음 12개월, 행복했던 추억 5년. 사람과의 관계는 알고 보면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다는 걸 안다면 나는 더 소중히 여길까? 아님 안도하다 결국 쓰레기통행이 된 닭가슴살 팩처럼 방치하다 버릴까? 그렇게 버리고 온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두고 왔을까?


 사실 보이는 숫자로 표기되지 않을 뿐, 세상의 모든 것에는 기한이 존재한다.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그 기한이 끝나는 순간과 필연적으로 마주한다는 것. 그 순간과 마주할 때, 버리는 것과 두고 가는 것의 구분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명확한 것 같다.


 “무관심으로 방치하다 결국” - 버림.

 “지금은 함께하지 않지만 언젠간 다시 함께 할 애정을 담아” - 잠시 두고 감.


 이미 끊겨버린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했다. 그중에는 정말 잘 끊었다 싶은 악연도 있지만,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났으면 하는 인연도 있었다. 그리고 되찾고 싶은 인연 중 일부는 어리석게도 내가 “버린” 것들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기한을 무한 것처럼 여기며 방치하다 결국 버린 것이다. 언젠가 끝나버릴 인연이라도, “잠시 두고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게끔 기한이 다할 때까지 관심과 애정을 쏟았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들이 달리 쏟아낼 곳 없이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갔다.


 집으로 돌아와 반쯤 비워진 냉장고에서 저녁거리에 사용할 식자재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간당간당 남은 식자재들로 볶음밥이라도 해먹을 요량이었다. 음식은 아쉽게도 “두고 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밖에.


 냉장고 안에서도 시간은 흐르며, 세상의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한이 붙는다.


 시간이 썰물처럼  멀리 가고 나면 수많은 기한들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가까워진 무언가의 끝을 마주한  이제라도 버리는 삶보다 두고 가는 삶이 되길 바라본다. 두고  인연이 돌고 돌아 언젠가  곁으로 돌아오는 날도 기다리며.




“멀어지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게을러지면 돼요

털어버린 우리 사이의 가치는

주운 사람이 알겠죠”

- 알레프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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