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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Jul 26. 2020

어른 지수 0과 1 사이

 직장  어린이집이 있는 회사에 다니면 가끔 귀여운 꼬마 손님들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혜택을 얻을  있는데, 얼마  친한 과장님이 딸을 사무실로 데리고 오셨다. 야무지게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꼬마 손님은  얼굴을 알아보고는 마스크 위로 눈이 반달이 되게 웃어주었다. 꼬마 손님의 미소에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 서랍에 넣어둔 비싼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건넸다. 하지만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책상  알록달록한 텀블러에 시선이 혔다. 과장님은 저건 커피라서  마셔, 어른 되면 마실  있어 라며 텀블러를 가리키는 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꼬마 손님은 짐짓 심각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른은  살이야? 예상하지 못한 꼬마 손님의 질문에 나는 양손에 과자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살부터 어른인걸까. 나는 지금 어른인걸까.


 어렸을 적 나에게 어른이란 “28살 이상의, 돈을 벌어서 공과금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가 28살에 아빠를 만나 결혼을 했고, 내게는 알 수 없는 협박장 같아 보였던 노란색 공과금 종이를 엄마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유치한 정의관을 꽤 오랫동안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 저 정의에 부합하는 날이 오면, 스스로 ‘아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달랐지만.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언제 될까 싶었던 28살이 되었고,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있으며, 잊을 만하면 안부를 묻듯 찾아오는 공과금 고지서도 받아보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생각해온 어른이 되었는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뜻밖의 것이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어른이 된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 28살을 지나온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 결론밖엔 없다. 왜냐하면 내 나이 숫자가 달라졌을 뿐, “나” 자체는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공과금 종이는 여전히 어렵고,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 몇 만원에 하루 종일 신이 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처럼 어른 있냐는 전화에 내가 아닌 다른 어른을 찾아서 바꿔주고, 고민될 때는 엄마 아빠부터 찾는다. 카톡 하나에 혼자 한참을 꽁해져 있기도 하고, 맛있는 거 하나에 화가 스스르 풀리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 지보다, 당장 오늘 저녁에 뭐 먹을 지를 더 열심히 고민한다. 진짜 어른이 되긴 한 걸까 싶다.


 그런데 이런 내게도 아주 가끔, 스스로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 조언을 해줄 순 있지만 선택은 언제나 나 자신의 몫임을 이해할 때. 누군가에게 실망하기 전에 내가 제멋대로 기대한 건 없는 지 생각할 때. 나쁜 일이 있어도 곧 좋은 일이 올 거라고 굳게 믿으며 견딜 때. 나의 가치를 몰라봐 주는 사람들을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놓아줄 때. 나만의 속도로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라고 조급함을 버리고 다짐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의 기쁨을 알 때.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은 무한정 있지 않다는 걸 느낄 때.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려 할 때. 만약에 이런 순간들이 모여 어른이 되는 거라면, 어쩌면 아주 조금은 어른에 가까워졌구나 싶기도 하다.


 어른 지수라는 게 있다면, 나는 아직 0과 1 사이 그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꼬마 손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줄 수가 없다. 또 누군가로부터 철이 덜 들었다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앞으로도 어른 지수 0과 1 사이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그냥 “나”답게 살려고 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니까.

어차피 우리 모두 처음 되어보는 어른이니까.




“괜찮아 너의 세상은 지금의 너 그대로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Stay here with me

어른스럽게 웃어넘긴 뒤에

어린애 같이 울 때에도

우린 참 닮았어 함께 해

너의 모습 그대로 어른 아이처럼”

- 세븐틴 <어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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