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어린이집이 있는 회사에 다니면 가끔 귀여운 꼬마 손님들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혜택을 얻을 수 있는데, 얼마 전 친한 과장님이 딸을 사무실로 데리고 오셨다. 야무지게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꼬마 손님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마스크 위로 눈이 반달이 되게 웃어주었다. 꼬마 손님의 미소에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 서랍에 넣어둔 비싼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어 건넸다. 하지만 과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책상 위 알록달록한 텀블러에 시선이 꽂혔다. 과장님은 저건 커피라서 못 마셔, 어른 되면 마실 수 있어 라며 텀블러를 가리키는 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꼬마 손님은 짐짓 심각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른은 몇 살이야? 예상하지 못한 꼬마 손님의 질문에 나는 양손에 과자를 쥔 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몇 살부터 어른인걸까. 나는 지금 어른인걸까.
어렸을 적 나에게 어른이란 “28살 이상의, 돈을 벌어서 공과금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가 28살에 아빠를 만나 결혼을 했고, 내게는 알 수 없는 협박장 같아 보였던 노란색 공과금 종이를 엄마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유치한 정의관을 꽤 오랫동안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 저 정의에 부합하는 날이 오면, 스스로 ‘아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달랐지만.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언제 될까 싶었던 28살이 되었고,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있으며, 잊을 만하면 안부를 묻듯 찾아오는 공과금 고지서도 받아보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생각해온 어른이 되었는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뜻밖의 것이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어른이 된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 28살을 지나온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 결론밖엔 없다. 왜냐하면 내 나이 숫자가 달라졌을 뿐, “나” 자체는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공과금 종이는 여전히 어렵고,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 몇 만원에 하루 종일 신이 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처럼 어른 있냐는 전화에 내가 아닌 다른 어른을 찾아서 바꿔주고, 고민될 때는 엄마 아빠부터 찾는다. 카톡 하나에 혼자 한참을 꽁해져 있기도 하고, 맛있는 거 하나에 화가 스스르 풀리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 지보다, 당장 오늘 저녁에 뭐 먹을 지를 더 열심히 고민한다. 진짜 어른이 되긴 한 걸까 싶다.
그런데 이런 내게도 아주 가끔, 스스로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 조언을 해줄 순 있지만 선택은 언제나 나 자신의 몫임을 이해할 때. 누군가에게 실망하기 전에 내가 제멋대로 기대한 건 없는 지 생각할 때. 나쁜 일이 있어도 곧 좋은 일이 올 거라고 굳게 믿으며 견딜 때. 나의 가치를 몰라봐 주는 사람들을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놓아줄 때. 나만의 속도로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라고 조급함을 버리고 다짐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의 기쁨을 알 때.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은 무한정 있지 않다는 걸 느낄 때.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려 할 때. 만약에 이런 순간들이 모여 어른이 되는 거라면, 어쩌면 아주 조금은 어른에 가까워졌구나 싶기도 하다.
어른 지수라는 게 있다면, 나는 아직 0과 1 사이 그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꼬마 손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줄 수가 없다. 또 누군가로부터 철이 덜 들었다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앞으로도 어른 지수 0과 1 사이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그냥 “나”답게 살려고 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니까.
어차피 우리 모두 처음 되어보는 어른이니까.
“괜찮아 너의 세상은 지금의 너 그대로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Stay here with me
어른스럽게 웃어넘긴 뒤에
어린애 같이 울 때에도
우린 참 닮았어 함께 해
너의 모습 그대로 어른 아이처럼”
- 세븐틴 <어른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