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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애 Aug 03. 2021

‘육아의 고통’과 마주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다  

육아는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 온걸까

코로나, 집콕, 가정보육, 어린이집 여름방학,

운동 센터 임시 휴업.

단어만 봐도 갑갑하기 짝이없는 지금의 상황.

그리고 어김없이 내일도 해야하는 육아.


아마 17개월 쯤 부터였을거다.

아이와 내가 기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순간.

내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누군가 그랬다. 18개월부터는 가급적 집에서 엄마랑 아이랑 단 둘이 죽이되든 밥이되든 지내라고.

사회성이니 뭐니 하며 여기저기 데리고다니면 애도 엄마도 개고생 이라나.


물론 아이는 커갈수록 ‘사랑스러움 레벨’을 나날이 경신해간다.

아, 인간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매번 놀랍고도 감사한 순간에 감격하지만

체력과 영혼이 탈탈 털리는 순간도 부지기수다.

이럴땐 정말이지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그저 나를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수십번, 수백번도 더 찾아온다.

실로 나를 놓아버리는 날도 잦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따고 야식을 한다.

어차피 후회할게 뻔한 짓인걸 알면서도 그거라도 하지않으면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는 것 같지만

결국엔 내 몸에 행패를 부리는거나 다름없다.


알지만 한다.

흔들리는거다. 내 마음이. 그래서 결국 몸도 흔들리는거다.

덜 힘들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지만 그래봐야 더 힘들어진다.


어느 날, 벗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어차피 힘들어. 내일도 힘들거야. 당분간도 힘들어.
그냥 너 자신을 잊어.
어차피 너는 너 자신을 잃어도 잃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냥 마음 편히 잊어버려.



제대로 현타를 받아서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도 여전히 갑갑하다.

진흙탕 속에서 첨벙대며 진흙을 온 몸에 스스로 문지르고 있으면서

‘에잇, 이 진흙 너무 싫어!’ 하고 있는 것 같다.


싫다면서 계속 하고있고,

아이가 너무 예쁘다고 하면서 힘들다,괴롭다 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내 상황과도 맞아떨어지는 진흙탕 놀이.




그래서, 오늘도 난 맥주 한 캔을 땄다.


그리고 육아고통, 육아 스트레스와 마주앉아 보기로 했다.


우선 묻는다. 육아에게.


“너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 온거니?”


“몰라서 물어? 솔직히 너 그동안 편하게 살았잖아.

너 하고싶은거 실컷 하고, 돈도 쓸만큼 쓰고,

타인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먼저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하물며 가족을 위해 한번을 희생하지 않고

오로지 너를 위해 40년을 살았잖아?

야~ 이정도면 마이 했어. 너도 좀 희생과 사랑, 인내라는 걸 해봐라.

인생에서 ‘희생’, ‘무조건적인 사랑’ 해보고 나면 진짜 어른이 될껄?”


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나만이 전부였던 세계에서
다른 사람.다른 상황도 좀 보면서 살아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육아가 찾아온게 아닐지.
(부대끼고 힘든 순간이 많겠지만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에서 분명 얻어가는 진주가 있을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내 세계 밖의 다른 것들을 챙기고 살다보면 또 보이는 게 있다.

모든게 완벽하게 정리된 편안한 상황에서는

어느정도의 의지만 있으면 내 자신을 잘 챙기며 멋지게 살 수 있다. 내가 그래왔던 것 처럼.

나는 자기관리의 끝판을 달리기에 최적화된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는 완벽하게 세팅된 편안한 상황이 아닌, 설령 그게 진흙탕 같은 곳일지라도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고난이도의 기술도 키워보라고 육아가 찾아온게 아닐지.


새로운 경험의 확장을 통한 접해보지 못했던 단어들의 진짜 의미를 경험하는 것. 예를들어 희생, 무조건적인 사랑, 모성애.

나를 우선시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최소한의 나를 지켜가는 방법을 깨우쳐가는 일종의 훈련. 트레이닝. 같은 것.

그럼으로써 찾아오게 될 성장과 기회.



육아의 고충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육아가 힘든 건 어쩌면 ‘기대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


두 돌도 안된 아기에 거는 기대. (밥도 늘 잘 먹고, 떼 부리지도 않고 늘 온순하며, 늘 통잠을 자고, 방긋방긋 항상 웃고….적다보니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신에게나 걸어야하는 기대를 아이에게 걸고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나에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이유도 분명 있다.

나는 육아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도 그때처럼 나를 우아하고 고상하게 잘 지켜갈 수 있을거라는 자만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거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이 고통은 절반 쯤 줄었을까?


기대를 하지 말고,

‘지금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지금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현명한걸지도 모르겠다.



음, 어렵다.

오늘은 육아가 나에게 온 의미까지 생각한걸로 끝내자.


더 기대하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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