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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 Nov 14. 2024

일상을 떠나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나 홀로 속초

[11/08 9:00]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나 홀로 국내여행'을 계획한 것은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학기 중에 다양한 일에 지쳐 힘든 시기가 찾아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설렘과 열정이 가득해야 할 개강 초기에 지친 것은 스트레스에 취약한 저에게도 제법 이례적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하루 정도 쉬면서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등, 일상에서의 휴식을 취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고, 겨울 향기가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냅다 숙소부터 예약하고 본 것이 오늘 여행의 시작이 되었네요.


수업을 빠질 용기도, 아르바이트를 빠질 용기도 없었던 저는 금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고 토요일 저녁 알바가 시작되기 전 약 24시간 남짓한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바다를 보는 것에 만족한다면 나쁘지 않은 계획일 것 같았어요. 여행을 가기 전부터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요, 바로 여행지에서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상과 생각을 글로 남겨보는 것이었습니다. 오수영 작가님의 에세이『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에 등장하는 제주 여행기로부터 감명을 받았어요. 그렇게 출발을 앞둔 현재, 오전 수업을 들으며 여행기의 시작을 작성해 봅니다.


여행의 명칭에 '뒤도 안 돌아보고'를 붙인 것은 일상으로부터의 완벽한 탈출을 희망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되도록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속초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즐길 예정이에요. 속초로 훌쩍 떠날 생각을 하며 힘들었던 시기를 제법 열심히 버틸 수 있었는데, 돌아와서는 여행의 추억이 그 기둥 역할을 대신해 주면 좋겠습니다.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오전 수업들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11/08 13:00]


속초행 버스에 올라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건넜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서울의 풍경 중 하나인데요, 서울을 떠나며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의 물결을 보니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는 기차, 지하철, 자동차 등에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울만의 낭만이라고 생각해요. 눈에 가득가득 담고 싶습니다.


여행지를 속초로 정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강원도의 초록빛 겨울 바다를 좋아하거든요. 지난 속초 여행에서 먹었던 오징어순대의 맛을 잊지 못한 것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구요. 평소 좋아하는 최진영 작가님의 신간 산문집에서 속초 바다를 보러 훌쩍 떠나는 내용이 등장하자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속초로 가면 되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좋아하는 책이 이끈 운명 같은 여행이었네요.


[11/08 15:30]

두 시간 반 가량을 달려 속초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평소에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은 아닌데, 24시간뿐이라는 이번 여행의 특성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계획대로 곧바로 택시를 타고 청초호 부근으로 이동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저는 여행지의 독립서점에 방문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점만의 특색이 드러나는 책을 한 권쯤 구입해서 여행의 기억으로 채우는 것이 저만의 낭만이에요.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 두 군데의 서점을 방문해 평소 관심 있던 작가님들의 책 두 권과, 동아서점 사장님께서 집필하신 에세이를 한 권 구입했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서명도 남겨주셔서 낭만 있는 경험을 하나 적립할 수 있었습니다. 서점마다 직원분들의 큐레이팅과 책의 배치 등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이 좋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취향이 드러나기 마련이잖아요, 그 취향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독립서점인 것 같아요. 언젠가 그런 공간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11/08 16:30]

그저 서점 두 군데를 돌았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속초는 커다란 호수를 품은 형태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요, 그 청초호 부근에 온 만큼 호수 구경을 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목적지였던 카페 대신 호수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카페를 찾아 운 좋게 창가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다와는 다르게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과 그 위로 날아다니는 갈매기, 물결을 타고 흐르는 논병아리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네요. 물멍이라고 하잖아요, 탁 트인 풍경의 커다란 호수를 바라보다 보면 현실의 스트레스에 무거웠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호수 너머로 형성된 도시의 풍경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물멍과 함께 잠깐의 독서를 해 준 뒤, 해가 지기 전에 속초 중앙시장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11/08 17:30]


속초 중앙시장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원래는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바람 부는 소리가 좋아서 그냥 걸어보았습니다. 슬슬 추워지는 겨울 공기가 마냥 싫지는 않았습니다. 당분간 다시 오지 않을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는 것도 즐거웠어요. 시장에서 저녁 식사 거리를 구입해 숙소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요, 어떤 가게에서 무엇을 구입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아 조금 헤매기도 했습니다. 수산 시장을 어리바리하게 헤매고 있으니 횟집 사장님께서 방어를 영업하시더라구요. 홀린 듯 방어회를 구입했습니다. 외지인에게 씌운 바가지인지 의심할 틈도 없었는데, 낭만만을 찾아 떠나 온 여행에서 바가지인들 어떤가 싶었어요. 먹고 싶었던 오징어순대도 지나가다 보인 곳에서 아무렇게나 구입하고, 궁금하던 옥수수 술빵도 아무렇게나 구입했어요. 배가 고파 얼른 들어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숙소까지 택시로 이동할 생각이었으나, 지도에 표시된 도보 25분이라는 글자에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는 대학생이기도 했고, 걸어가면서 도시의 풍경을 눈에 더 담아보고 싶기도 해서 또다시 걷기를 택했습니다. 시장에 갈 때와는 달리 양손이 무겁고 지형이 비교적 험난해 애를 먹었지만, 낯선 곳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은 제법 기분이 좋았습니다. 생각이 많을 때면 무작정 밖에 나가 목적지도 없이 걷곤 했거든요. 현실의 수많은 생각들을 안고 걷다 보면 생각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여러 생각들 속에서 힘차게 걷다 보니 해수욕장 바로 앞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1/08 18:30]

고심 끝에 고른 숙소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루도 채 머물지 않을 공간이지만 바다가 보이고 바닷바람이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시장에서 구입한 방어회와 순대를 펼치고 식사와 함께 할 영화를 골라 저녁 식사를 시작해 봅니다. 이번 겨울 첫 방어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2년 만에 먹은 오징어순대도 감동적인 맛이었어요.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이라는 것을 알고 구입했지만, 제 생각보다도 제 위장이 작더라구요. 야식으로 먹을 양을 반 정도 남겨두고, 배부른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나를 위해 배 터지게 먹을 음식을 구입한 데에는 전혀 후회가 없어요. 간만에 느끼는 온전한 행복감에 취해 편안한 저녁을 보냈습니다.


[11/08 20:30]

전날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제가 계획한 낭만을 반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어요. 바다가 보이지도 않을 때부터 들리는 힘찬 파도 소리가 참 웅장하게 느껴졌습니다. 부산의 하늘빛 바다와는 다르게, 강원도의 동해 바다는 에메랄드 빛이에요. 어두운 저녁의 바다는 그 깊이가 더욱 깊게 느껴져 압도당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묘하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메모장을 켰어요. 세차게 부서지는 파도와 차가운 바닷바람. 겨울이 가장 빠르게 찾아오는 지역의 바다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 차가운 모래사장에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을 기록했습니다. 항구와 방파제, 등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과 반짝이는 인공위성, 모든 게 '바다'의 정석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겨울 바다가 떠오르면 몇 번이고 찾아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학업도 진로도 살아가는 태도와 내가 좋아하는 것, 내 마음, 내 감정 등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생각은 '나는 잘 나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많은 생각들을 안고 또 한 걸음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불안한 지금도 잘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 살아왔어요. 바다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바다의 웅장함은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세차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떠올리면, 그 강한 힘을 떠올리면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08 21:00]

추운 날씨에 오랜 산책이 어려워 금세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밀린 글을 마무리하고 오늘 구입한 동아서점 사장님의 책을 펼쳐보았어요. 속초에서 속초 책 읽기. 활자 여행의 낭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다도 보고, 숙소에서 낭만 있게 독서도 즐겼으니 오늘 목표한 바는 다 이루었네요. 내일의 계획을 간단하게 세운 뒤, 내일 일정(귀가 및 아르바이트)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습니다. 많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 잠드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었네요.



[11/09 10:00]


체크아웃을 한 시간 남겨두고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전날의 피로가 쌓인 탓인지 몸이 무거워 별다른 준비 없이 짐만 챙겨 숙소를 나섰습니다. 버스 터미널이 있는 속초 해수욕장 부근으로 이동해 점심 식사를 하고 바다 구경을 한 뒤, 방문하려던 카페 몇 군데를 들를 생각이었어요. 점심 식사 메뉴는 막국수로 진작에 정해두었는데, 마침 속초 해수욕장 근처에 들기름 막국수를 파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고소한 막국수를 배부르게 먹어주며 이번 여행의 식사가 전부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속초 해수욕장은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강아지, 어린아이들과 동행한 가족들이 많아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는 날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저녁에 보던 바다와 다르게 윤슬이 반짝거리는 파란 바다였지만, 그 강인한 파도는 여전하더라구요. 힘차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따라 잠시 걸었습니다. 바다를 두 군데나 방문할 수 있다니 계획을 참 잘 세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걷다 보니 목적지였던 카페에 닿았습니다. 푸딩을 파는 카페인데, 감자 푸딩과 두부 푸딩을 팔거든요. 디저트에 죽고 못 사는 스스로에게 기념품으로 푸딩을 선물했습니다. 푸딩 가게에서 또 잠깐을 걸으면 감자 젤라또를 파는 카페가 나오는데요, 버스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감자 젤라또도 먹어주었습니다. 아무래도 달달한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현실을 벗어난 여행의 묘미겠죠.


[11/09 13:00]


약 24시간 남짓한 속초에서의 하루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르바이트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젠 정말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어요. 계획한 것 이상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내 뿌듯한 마음이 들었고, 당분간 지치는 일이 있을 때 버틸 수 있는 기억 하나를 만든 것 같아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에요. 차가운 바닷바람과 세찬 파도소리, 그 바다의 웅장함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디뎌 보겠습니다.


-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국내여행기: 속초 편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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