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해보여도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2025. 03.18
그가 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이대로 그를 보내면 정말 끝일 것 같아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모레도 좋고 내일도 좋으니 이사 가기 전에 보자고.
예상외로 그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다가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합의했다.
그를 만나기로 한날, 나는 그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했던, 꼭 선물하고 싶었던 책 한 권을 급하게 사서 편지를 썼다.
서점에서 책과 함께 고른 고슴도치 편지지에 하나, 책 맨 뒷장에 하나 총 두 개의 편지였다.
얼마 만에 써보는 편지인지 한 장을 채 다 채우기도 전에 손이 저려올 정도였다. (그만큼 악필이기도 했다.)
비록 글씨체는 끔찍했지만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당신은 정말 멋지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니 자책하지 말라는 다소 오그라드는 말들을 편지지에 적은 뒤, 책 뒷장에는 왜 이 책을 꼭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적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헤어지기 전에 그의 손이라도 잡아봐야겠다는 약간의 흑심을 품고 집을 나섰다.
평소 같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그를 만나러 간 집 근처 카페. 먼저 와있던 그는 정말 평소처럼 나를 맞아주었다.
그가 민망함+미안함에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시간도 아주 잠깐 있었지만 우리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나는 안도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날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눈 깜짝할 새 흘러버렸고, 저녁시간 무렵 자리를 옮겨 바 테이블이 있는 작은 술집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엔 내게 연락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랬기에 내가 먼저 연락을 줄거란 생각도 못했다고.
그리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했다.
술자리 내내 그는 나를 정리하려는 사람이라기엔 노골적으로 내게 많이 기울어진 자세였고 우리의 어깨는 살포시 맞닿아 있었다.
"붙어있으니 참 좋네요. "라고 멋쩍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엉덩이를 한껏 가까이 붙여 앉은 강아지가 생각나서 귀엽기도 했다.
우리는 그날도 참 긴 시간을 대화로 채우며 함께했고, 그 대화는 늘 그랬듯 다정하고 따듯했다. 그날 밤, 우리는 나의 바람대로 손을 잡았고, 그는 여느 때처럼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그리고 곧 다가올 내 생일에 한번 더 보자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이상했다. 하고자 했던 것을 다 이룬 하루였는데도 마음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분명 우리는 그날 서로의 손을 잡았고, 포옹도 했지만 왜인지 마음의 거리감이 조금 더 생긴 것 같은 밤이었다.
그것은 내 생일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었을까.
그날 그는 평소와 달리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고 나는 평소와 달리 다소 불편한 옷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조금 씁쓸했었다.
ps.
아. 이건 비밀인데 사실 고슴도치 편지지는 그냥 생각 없이 고른 건 아니었답니다.
삐죽삐죽한 가시를 가졌지만 좋아하는 이에게는 가시를 한껏 내리고 다정히 곁을 내어주는 점도, 까칠해 보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귀여운 점도 당신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홍진구의 [자위부과]라는 그림 속의 고슴도치처럼 기발하고 귀엽고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평소의 당신과 결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대입해 보면 그럴싸한 게 너무 웃기더라고요?
그리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라는 속담을 아시는지?
물론 당신이 내 새끼라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
당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모습도 내 눈엔 다 이뻐 보였다는 마음까지 담아 고른 편지지였어요.
아마도 당신은 영영 모를 것이고, 그러길 바라지만.